계절을 종잡을 수 없이 기온이 오르락내리락하느라 봄인지 여름인지 헷갈리는 시절을 보냈다. 4월의 낮 기온이 30도를 육박하고 늦봄의 꽃들이 서둘러 피기도 했다.
봄이 오면 이른 봄에는 주로 노란색의 계절이다. 노란 계절이 개나리와 함께 기세가 누그러지면 진달래를 시작으로 철쭉과 산철쭉이 피어나면서 분홍색의 봄이 된다. 여름을 눈앞에 둔 5월에는 분홍색의 꽃들을 뒤로하고 흰색의 꽃들이 많아진다. 같은 봄이라도 색이 다른데 올해는 날씨가 널을 뛰는 바람에 꽃이 피는 격차가 크지 않아서 봄이 짧은 듯이 느껴진다. 그렇게 아쉬운 봄은 깊어가고 여름을 맞이하는 준비의 계절이 5월이다.
파릇하고 불긋하게 잎이 나던 나무들은 거침없이 자라서 이제 산이 빈틈없이 초록으로 물들었다. 그 초록들 사이에 어떤 식물들이 꽃을 피울까? 어떤 꽃들은 아직 숲 바닥에서 필 것이고 어떤 꽃들은 높은 나뭇가지에서 화려하게 필 것이다. 또 어떤 나무들은 수줍은 듯이 숨어서 꽃을 피울 것이고 어떤 나무들은 당당하게 필 것이다.
그런 꽃들의 향연을 더욱 아름답게 누리려면 5월에는 숲속 그늘 아래로 들어 가거나 높은 산 능선으로 올라가야 한다. 풋풋함이 가득한 숲속에서 햇살이 투과되어 투명하기 그지없는 초록 잎사귀들을 올려다보며 향기에 취하기 좋다. 또 탁 트여서 머나먼 산줄기가 보이는 능선에 화려하게 핀 꽃들과 함께 걷기도 좋다.
눈길 가는 곳 어디든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는 시절이다. 이 아까운 계절이 다 가기 전에 팔공산에서 누려보면 어떨까. 찬란한 계절의 여왕 5월을...

◆"오월"이라는 시의 주인공, 오동나무
오월을 노래한 김용택시인님의 시가 있다. 그 주인공은 오동나무다.
연보라색 오동꽃 핀/ 저 화사한 산 하나를 들어다가/ "이 산 너 다 가져"하고/ 네 가슴에 안겨주고 싶다./
단 한 문장으로 된 이 시를 참 좋아한다.
오동나무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딸을 낳으면 마당에 심어서 스무살이 되면 가구를 만들어 시집보낸다라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요즘이야 가구를 만들기 위해 마당에 오동나무를 심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일까. 우리의 정서와 점점 멀어지는 나무중에 하나가 오동나무다.
오동나무는 우리나라의 야산에서 심심찮게 보인다. 보통 먼 곳에서 산을 바라보면 푸르른 5월의 숲에 우뚝 솟아 연보라색 꽃을 피운다. 그러면 거기 오동나무가 있는 줄 안다. 또 오동나무 아래에 있게 된다면 고개 숙여 땅바닥의 꽃을 주워 올려야 한다. 그래야 그 향기에 한껏 취할 수 있다. 그 어떤 고급스럽고 향기로운 술도 오동꽃만큼 사람을 취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고혹적인 사기꾼, 은방울꽃
은방울꽃은 풀꽃 중에서도 꽃이 늦게 피는 편이다. 햇볕을 찾아 군집을 이루고 자라기도 하지만 숲 아래 약간 어두운 곳에서도 곧잘 자란다. 꽃이 피는 만큼 열매를 맺지는 못하지만 땅속줄기를 뻗어서 새로운 식구를 만들고 군집을 늘릴 수 있다.
은방울꽃은 숨어서 피기를 좋아한다. 꽃을 자세히 보려면 허리를 숙이고 잎사귀를 젖혀가며 보아야 한다. 조롱조롱 아래를 향해 흰 꽃들을 피우면 사람들은 꽃보다 향기로 먼저 알아챈다. 그 작은 꽃에서 어떻게 그런 아찔한 향기가 나는지...
식구가 늘어가는 만큼 향기도 밀도가 높아지는 것일까. 모여 자라는 작은 군집 옆을 지날 때면 코를 자극하는 진한 향기에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정신을 차리면 사기를 당했다는 생각이 든다. 깜찍한 외모에 이토록 치명적인 향기를 감추었으니 첫 번째 사기요. 꽃보다 먼저 인식한 향기와 상반되는 귀여운 외모를 감춘 것이 두 번째 사기다. 은방울꽃은 고혹적인 사기꾼이다.

◆바라만 보세요. 때죽나무
이름이 풍기는 어감과는 다르게 꽃이 무척 예쁘고 사랑스러운 나무가 때죽나무다. 이른 봄에 초록색의 작은 잎들이 일찍 나와서 자란다. 이후 잎겨드랑이에서 조그마한 꽃대가 나와서 아래로 대롱대롱 늘어진다. 그 끝마다 한 개의 꽃이 땅을 보고 달리는데, 하얀 꽃은 은방울꽃처럼 향기를 가득 품었다. 맑은 날에도 비가 오는 날에도 꽃은 변함없이 피어 있다.
그런 꽃이 어느 날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도톰한 질감의 꽃잎은 그 무게 때문일까 바람이 불어도 날리지 않고 바로 나무 아래도 떨어진다. 하나의 꽃이 고운 매력 그대로 땅으로 내려오면 나무 아래를 온통 하얗게 수놓는다.
외모와는 다르게 때죽나무는 예쁜 자태 속에 독을 품고 있다. 나뭇가지가 품은 독은 물고기를 기절시키는데 사용했다고도 하고, 꽃이 지고 자라는 열매의 껍질에도 독이 있다. 때죽나무는 그저 바라보며 즐기기만 하면 된다. 나무에 피었을 때나, 밟기도 미안한 땅에 내려앉은 꽃이나, 그 아름다움은 매한가지다.

◆미스킴라일락의 원조로 알려진 털개회나무
털개회나무라고 하면 잘 모르지만 미스킴라일락이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꽃은 구분하지 못하더라도 이름은 들어봤고 라일락 종류라는 것은 안다. 미스킴라일락은 한 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털개회나무의 씨앗을 가지고 가서 개량한 품종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 체류할 당시 일을 도와주던 여직원 미스킴의 이름을 붙여 미스킴라일락이 되었다고 한다. 다시 원예종으로 수입된 미스킴라일락은 키도, 잎도, 꽃도 자그마하게 개량된 품종이다.
우리나라에는 라일락과 비슷한 식물이 산에 꽤 많다. 그중에 하나가 털개회나무이다. 이전에는 정향나무라고도 불렸다. 산에서 털개회나무를 처음 만나면 하나같이 같은 말을 한다. "아니 라일락이 왜 여기 있지?"라고...
털개회나무는 엄연히 우리나라 자생식물이고 그러니 숲에서 만나는 것은 당연하다. 혹시 5월의 산에서 라일락과 닮은 꽃을 만나면 반갑게 맞아주면 좋겠다. 향기도 라일락 못지않으니 눈을 감고 향기를 즐기는 것은 덤이다.

◆이보다 더 예쁜 연분홍은 없다. 철쭉
진한 꽃분홍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연분홍 철쭉. 이보다 더 고운 연분홍이 있을 리가 없다싶을 만큼 그 빛깔에 가히 반할 만하다. 굳이 향기를 가질 필요가 없을 만큼 아름다운 색을 가진 철쭉은 자주 만날 수 있는 나무다. 철쭉은 높은 산 능선을 좋아한다. 낮은 산지에서도 만날 수 있지만 능선에 무리를 지어 꽃이 피는 모습을 보면 그 고상한 화려함을 말로 다 하기 어렵다.
진달래보다 조금 늦게 피며 진달래보다 꽃 색이 연하다. 그래서 연달래라고도 불린다. 진달래는 꽃이 먼저 피는반면 철쭉은 잎과 꽃이 함께 나온다. 밝은 초록색의 잎과 어울려서 더욱 그 색이 돋보인다. 그 아름다움에 반해 사람들은 철쭉이 피면 축제를 한다. 연분홍의 철쭉과 진분홍의 산철쭉을 통합하여 흔히 철쭉축제를 연다.
팔공산 비로봉에 가면 아주 유명하고 아름다운 나무가 한그루 있다. 쩍 갈라진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홀로 고고히 선 철쭉이다. 그 철쭉을 보기 위해서 기어이 비로봉을 올라가는 사람도 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혹적인 나무, 그 바위에 당당히 선 철쭉이 꽃 필 때가 바로 지금, 오월이다.

글·사진 산들꽃사우회 (대표집필 김영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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