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민의 나무오디세이] 철쭉, 퇴계 선생도 음력 4월 소백산 산상화원에 감탄

입력 2024-05-01 11:16:41 수정 2024-05-01 18:19:08

진달래꽃 닮은 꼴 색감 다양·화려…독성 때문에 먹을 수 없다고 '개꽃'
봉화 옥돌봉 580여년 최고木 존재…연산군이 가장 좋아한 붉은 연산홍
철쭉 나무로 만든 구불구불 '척촉장'…고려 '청려장' 밀려 사라진 게 다행

철쭉꽃이 활짝 피어서 산상화원을 이루는 경남 합천 황매산에서는 올해 철쭉제를 12일까지 연다. 1970년대 목장으로 개발된 황매평전에 철쭉 무리만 살아남아 자연스럽게 군락이 형성됐다.
철쭉꽃이 활짝 피어서 산상화원을 이루는 경남 합천 황매산에서는 올해 철쭉제를 12일까지 연다. 1970년대 목장으로 개발된 황매평전에 철쭉 무리만 살아남아 자연스럽게 군락이 형성됐다.

청명과 한식은 1년의 봄이라

淸明寒食一年春(청명한식일년춘)

시절 물건들 아롱지며 눈에 들어 새롭구나

節物斑斑入眼新(절물반반입안신)

붉은 빛은 산꽃에 들어가 철쭉꽃이 타는 듯하고

紅襯山花蒸躑躅(홍친산화증척촉)

푸른 들은 들나물을 끌어내 고운 자리 편듯하네

靑挑野菜細茵陳(청도야채세인진)

(이하 생략)

조선 전기 영남학파의 종조인 김종직(金宗直)이 쓴 한시 「한식」(寒食)의 봄 정취를 읊은 부분이다. 식목일과 비슷한 시기인 청명과 한식쯤에 초목이 자라난다. 농경사회에서는 논밭을 고르거나 가는 등의 농사를 시작하는 때다. 야산에서는 철쭉의 꽃과 잎이 새로 핀다.

철쭉꽃 무리들은 진달래꽃과 모양이 비슷하지만 색감이 우아하고 다양하다. 선홍, 진홍, 분홍, 연분홍, 흰색 등의 색상은 봄철 도심을 화려하게 장식해 사람의 눈길을 빼앗는다. 꽃샘추위마저 완전히 물러가는 4월부터 5월에 걸쳐 주택가 화단이나 공원에 화려한 색상의 꽃물결을 이룬다.

◆신라 절세미인 수로 부인의 꽃

철쭉이라는 이름은 척촉(躑躅)에서 나왔다. 한자를 풀어보면 머뭇거릴 '躑(척)'자와 머뭇거릴 '躅(촉)'을 썼다. 옛날 중국 유목민들이 독성을 가진 철쭉을 뜯어먹은 양들이 똑바로 걷지 못하고 비실대는 모습을 보고 붙인 이름이 양척촉(羊躑躅)이다.

철쭉축제로 유명한 경남 황매산의 철쭉 군락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공감하기 쉽다. 해발 800~900m의 넓은 평전에 1980년대 목장을 조성했다. 방목한 젖소, 양 등 가축들이 잡목과 풀을 모조리 먹어치웠으나 철쭉을 건드리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간 뒤 목장 터에 남은 철쭉만이 저절로 군락을 이뤘다.

꽃모양이 비슷한 진달래꽃은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참꽃이라 부르고 철쭉꽃은 먹을 수 없기 때문에 '개꽃'이라고 불렀다.

결이 조금 다른 이야기로는 꽃이 하도 예뻐서 지나가던 나그네의 걸음을 머뭇거리게 해서 '척촉'으로 불렀다는 설이다.

옛 문헌에 나오는 철쭉꽃 설화는 『삼국유사』 「기이」(紀異) 조의 수로부인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純貞公)이 강릉 태수로 부임해 가다가 해변에서 점심을 먹었다. 곁에는 높이 천 길이나 되는 돌산 낭떠러지가 병풍처럼 바다에 닿아 있고 꼭대기에 철쭉꽃이 많이 피어 있었다. 신라 최고 미녀인 수로부인이 꽃을 꺾어 올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모두가 험해서 안 된다고 대답했다. 때마침 암소를 끌고 가던 노인이 수로 부인의 말을 듣고 꽃을 꺾어 바쳤다. 노옹이 이때 부른 향가가 유명한 헌화가(獻花歌)다.

경상북도 봉화군 우구치리 옥돌봉에 있는 580여 년 된 철쭉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노거수로 높이가 5m, 밑동 둘레가 1m 넘어 2020년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됐다. 영주국유림관리소 제공
경상북도 봉화군 우구치리 옥돌봉에 있는 580여 년 된 철쭉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노거수로 높이가 5m, 밑동 둘레가 1m 넘어 2020년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됐다. 영주국유림관리소 제공

◆국내 가장 오래된 철쭉 봉화에

철쭉은 전국 야산이나 높은 산 어디서나 볼 수 있으며 줄기가 여러 갈래로 자라는 관목이다. 키는 비교적 작은 2~3m정도다. 경상남·북도에 걸쳐있는 가지산 정상과 강원특별자치도 정선군 반론산에 있는 천연기념물 철쭉 군락에는 키가 3.5∼6.5m, 수관 폭이 6∼10m에 이르는 것도 있으며 수령은 100∼450년으로 추정된다.

경북 봉화군 우구치리 옥돌봉 아래의 580여 년 된 철쭉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진달랫과 나무로 높이가 5m, 밑동 둘레가 1m 넘는 노거수다. 역사로 따지자면 세종대왕 시절부터 생장한 셈인데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6년엔 보호수로, 2020년엔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됐다.

철쭉의 꽃잎은 살짝 주름이 잡혀 있으며, 아래가 서로 붙어 있는 통꽃으로 전체적인 모양이 깔때기를 닮았다. 꽃잎의 안쪽에는 주근깨 같은 진한 점들이 있고, 수술은 10개다.

진달랫과 집안의 꽃 피는 시기는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3, 4월에 진달래 4, 5월엔 철쭉이 핀다. 진달래는 꽃이 먼저 피고 잎이 나중에 돋아나지만 산철쭉과 철쭉은 꽃과 잎이 거의 같이 나온다. 분홍의 진달래꽃보다 꽃잎 색이 엷다고 '연달래' 진달래에 이어서 연달아 핀다고 '연달래'라고 부르기도 한다.

연달래로도 불리는 철쭉꽃.
연달래로도 불리는 철쭉꽃.

(석름봉과 자개봉 그리고 국망봉) 세 봉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는 8~9리 사이에는 철쭉꽃이 숲을 이뤄 한창 피고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그 아름다움에 마치 비단 장막 속을 지나는 듯하고 축융의 잔치에 취한 듯해 참으로 즐거웠다. 봉우리 위에서 술 석 잔을 마시고 시 일곱 편을 짓고 나니 해는 이미 기울어지고 있었다. 옷을 털고 일어나 다시 철쭉꽃으로 숲을 이룬 사이를 따라 내려와서 중백운암에 이르렀다. <『퇴계선생문집』 권41>

퇴계 선생이 풍기 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음력 4월 소백산을 둘러본 「유소백산록」의 일부다. 철쭉꽃으로 수놓은 듯 산 정상의 광경을 '비단 장막'이라고 표현하고 불그레한 색감을 불의 신 '축융'의 잔치에 비유할 정도로 감탄했다. 소백산 정상의 철쭉 군락은 5월 말쯤에 그야말로 산상화원을 이룬다.

소백산 국립공원 연화봉 주위에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다. 멀리 천문연구원 시설이 보인다.
소백산 국립공원 연화봉 주위에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다. 멀리 천문연구원 시설이 보인다.

◆'경국지색' 미녀 서시에 견주는 일본철쭉

우리나라 진달래속(로도덴드론·Rhododendron)의 자생 철쭉에는 겹산철쭉, 철쭉, 산철쭉, 흰산철쭉으로 나뉜다. 물론 국가표준식물목록에는 인위적으로 육종한 재배종(원예종)도 수십 가지도 등재돼 있다.

철쭉과 산철쭉은 둘 다 산에서 자라는데 산철쭉이 이름과 달리 도심 화단에 많이 있어 더 친숙하다. 철쭉과 생태가 닮았지만 꽃 색깔은 붉은 빛이 많이 들어가 진달래꽃 못지않게 아름다워 오래 전부터 정원에 많이 심었기 때문이다. 산철쭉은 나뭇잎 모양이 새끼손가락 정도의 길이로 철쭉보다 훨씬 날렵하게 생겼다.

경북 청송 주왕산의 산철쭉을 '수달래'라고 일컫는데 주방천 골짜기 물가에서 잘 자라기 때문이다. 유난히 붉은 빛을 띠는 수달래는 주왕(周王)의 '핏빛' 전설이 깃든 주왕산의 상징물로 자리매김했다.

시중에는 우리 토종의 철쭉 무리 외에도 외래종 철쭉이 많다. 대표적인 일본철쭉 품종은 사츠키(さつき·皐月)로, 5월이라는 뜻이며 바로 꽃이 피는 시기를 가리킨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일화를 조선 전기 강희안의 『양화소록』의 「일본철쭉꽃」에서 찾을 수 있다.

"세종 23년(1441)봄에 일본에서 철쭉 두어 분을 공물로 보내와 대궐 안에 심었다. 꽃이 피는데 꽃잎이 흩어지고 크며 빛이 석류꽃을 닮았고 꽃받침이나 꽃술이 오래도록 변하지 않으니 빛깔이 검붉고 잎이 많이 붙은 우리나라 철쭉과는 곱고 추함이 모모(嫫母)와 서시(西施)에 비할 게 아니다."

선비의 눈에 일본철쭉의 꽃이 얼마나 매혹적으로 보였으면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중국 미녀인 서시에 견줬을까. 또 꽃을 아홉 품계로 나눈 「화목구품」(花木九品)에서도 일본철쭉(왜철쭉)과 영산홍을 3품으로 꼽았지만 고유종인 흰진달래를 5품에, 홍철쭉과 진달래는 그 보다 낮은 6품으로 분류했다.

영산홍
영산홍

◆"영산홍, 금과도 못 바꿔"

강희안은 「화목구품」에 일본철쭉과 영산홍을 따로 적은 까닭이 궁금해진다. 일본에서 육종된 오늘날의 영산홍과 같은 품종인지 아니면 같은 이름의 다른 토종을 말하는지 헤아리기 어렵다.

영산홍(映山紅)은 산을 붉게 비출 만큼 아름답다는 뜻으로 왕조실록과 선비들의 문집에도 등장한다. 영산홍을 가장 좋아한 임금은 연산군으로 1만 그루를 후원에 심도록 분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영산홍은 키가 15~90cm로 아담하며 잔가지가 많아서 정원이나 화단에 심기 알맞다. 조선 중후기로 오면서 영산홍은 선비들도 즐기는 꽃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조선 후기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시작한 김조순(金祖淳)의 시 「옥호정사에 영산홍이 활짝 피다」(壺舍映山紅盛開)에 '옥호정사엔 많은 꽃 품종이 있지만/ 이것만은 금으로도 바꾸지 않으리라'(壺舍多花品/ 玆惟不換金)고 할 정도로 귀하게 여겼다.

영산홍이나 철쭉의 꽃말이 꿈, 열정, 첫사랑, 사랑의 기쁨이기 때문에 많은 학교에서 교화로 삼고 있다. 대구 달성군 현풍중·고등학교, 동구 율원초등학교는 철쭉을, 대구금포초등학교, 다사중학교, 경북 구미 현일고등학교는 영산홍을 교화로 지정했다. 고운 빛깔처럼 아름다운 꿈을 꾸는 학생들이 철쭉이나 영산홍의 꽃말을 가슴 속에 새기며 열정적으로 노력하자는 의미이리라.

도심 화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예종 산철쭉.
도심 화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예종 산철쭉.

이밖에 서양의 재배종 철쭉 '아잘레아(azalea)'도 자태가 아름답다. 유럽인들이 동양 철쭉을 가져다가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에서 화려하게 개량한 서양철쭉을 두루뭉술하게 부르는 이름이 아잘레아다. 실내 식물로 육종돼 우리나라의 노지에서 겨울나기가 어려워 주로 화분에 재배한다. 분홍의 예쁜 색감이 극치를 이루며 꽃 모양이 진달래속의 만병초와 비슷하고 기화기가 긴 게 장점이다. 유럽에서는 장미만큼 품종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영산홍과 일본철쭉, 산철쭉, 서양철쭉 등 철쭉 무리는 이름이 다양한데다 이들 간 교배종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꽃 이파리는 선홍에서 핑크색, 흰색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고 꽃잎에 그러데이션(gradation)을 넣은 새로운 재배종이 쏟아져 나오고 형태도 홑꽃, 겹꽃 등으로 발달해 가히 '천의 얼굴'을 가졌다고 해도 무방하다.

원예종 흰산철쭉.
원예종 흰산철쭉.

◆척촉장이라는 지팡이

철쭉은 꽃을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무로 척촉장(躑躅杖)이라는 독특한 지팡이를 만들어 썼다. 조선 숙종 때에 80세 넘어 우의정에 전격 발탁된 허목(許穆)이 스스로 펴낸 『기언』(記言) 권63에 보면 「구정봉에서 내려오다 산 북쪽에서 쉬고 있는데 스님 희극이 나에게 철쭉 지팡이를 선사하기에 고시 한 수를 지어 사례하다」(從九井下憩其陰有浮屠煕克贈我躑躅杖作古詩一首酬之)라는 시가 있다. 스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철쭉 지팡이가 고마워서 태백산을 유람하면 아마도 지팡이 덕에 수염과 눈썹이 푸른 신선이 될 것이라고 기뻐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에 나오는 「만물문」 도죽장(桃竹杖)에도 '빛깔이 아름답고 모양도 이상하게 생긴 것은 척촉장(躑躅杖) 같은 것이 없으나…'라는 구절을 볼 때 철쭉나무는 옛날엔 지팡이로 유용하게 쓰였다. 가볍고 실용적이며 가성비가 좋은 등산지팡이나 고급스러운 청려장에 밀려나 척촉장이 사라진 게 철쭉 입장에선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나무칼럼니스트 chunghaman@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