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들려주는 클래식] <53>존 케이지(John Cage)의 미니멀리즘, ‘4분 33초’

입력 2024-04-29 16:16:27

서영처 계명대 타불라라사 칼리지 교수

존 케이지의
존 케이지의 '4분 33초' 악보.

존 케이지 작 '4분 33초'는 1952년 8월 29일 뉴욕주 북부 우드스탁 숲속에 위치한 메버릭 콘서트홀에서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튜더(David Tudor)가 초연했다. 그러나 실은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았다. 피아노는 열려 있었고 중간 중간 악보를 넘기긴 했으나 4분 33초 동안 연주자는 침묵했다. 그리고 피아노 뚜껑을 닫고 무대를 떠났다. 공연이 끝이 났다. 그뿐이었다.

'4분 33초'는 총 3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악보에는 다만 1악장 TACET(침묵), 2악장 TACET(침묵), 3악장도 TACET(침묵)으로 적혀 있다. '4분 33초'는 오선 위에 어떤 음표도 없는 곡이다. 곡 제목은 전체 연주 시간에서 따왔다. 관객은 침묵을 통해 소음의 청취자가 되는 것이 이 음악의 의도이다. 먼 곳까지 차를 몰고 음악을 들으러 온 관객들은 급진적인 침묵의 음악에 혼란과 충격을 받았다.

'4분 33초'는 연주 현장에서 우연히 만들어지는 기침 소리, 바람 소리, 나뭇잎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빗방울 소리, 실망한 관객이 불만을 표시하며 공연장을 나가는 소리 등의 자연스러운 소음이 작품을 구성한다. 작곡자는 음악 윤곽과 아이디어만 전해주고 나머지는 연주 당시의 불확정적인 우연성에 맡긴다. 연주 환경 자체가 매번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구조다. 이것은 이제껏 음악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며, 자연발생적인 소음을 통해 음악을 지겹도록 아름다운 소리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의도이다.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이 곡은 존 케이지를 단번에 세계 최고의 전위 예술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케이지는 일본 불교학자에게 선을 배우며 동양 사상을 음악의 과정 속으로 끌어들였다. '4분 33초'는 선(禪)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무의도성에 목적을 둔다. 그가 시도한 침묵의 소리는 불교 경전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만물은 실체가 없으며 그 실체 없음이 곧 실체)이라는 명제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것은 다시 '위도일손 손지우손 이지어무위'(危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도는 날마다 더는 것이며, 덜고 덜어 무위에 이르는 것)라는 노자의 무위(無爲)에 닿는다. 또한 장자의 제물론(齊物論) 중 자유(子遊)와 자기(子綦)의 대화에 드러나는 하늘의 퉁소 소리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케이지의 의도는 비어 있는 시공간에 더 많은 것들을 담을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시사한다. 텅 빈 침묵은 폐쇄적인 것이 아닌 열려 있는 침묵으로, 음악에 있어서 여백의 미, 여백의 소리를 창조하는 실험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음악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일상에 흩어져 있는 삶 주변의 소리에 주목하는 것이며, 음악과 소음의 경계를 넘어 더 깊은 소리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며, 소음을 통해 소리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그는 비움을 통해 동양의 내면에 한 발짝 들어섰고 음악을 모든 질서로부터 해방시켜 시간과 공간 속에 자유롭게 두고자 했다. 가히 혁명적인 시도라 할 수 있다.

'4분 33초'는 있는 그대로의 소리를 추구하며 비합리의 합리와 부조리의 조리를 들려준다. 그러면서 성채처럼 튼튼하게 쌓아올린 서양 음악의 규칙과 질서의 오랜 전통을 조소한다. 약 70여 년 전 케이지의 시도는 지금도 모든 전위적 시도의 맨 앞에 선 획기적인 작품으로 회자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