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미의 마음과 마음] 가족이란 이름의 독성관계

입력 2024-04-25 12:38:20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일본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슬쩍 갖다버리고 싶은 게 가족이다' 라고 했다. 누구나 가족과 관련된 상처와 무게를 지니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상처 중에 가족으로부터 받는 상처가 가장 많다. 최근에는 심리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처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고, 물속에 잠겨있던 가족 간의 문제가 수면위로 떠오르면서 이것을 해결하려는 분들이 많아졌다.

한 가정은 한 나라와 같아서 국가 기밀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듯이, 가정사는 담벼락을 넘지 않는다는 게 통념이었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에게 은혜를 갚는 것이 지극히 마땅한 일이라고 여겼기에 가족 간의 상처가 있어도 혼자 괴로워하거나 잊으려고만 했다. 이것은 나중에 대인 불안이나 공황 불안 등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가족이 주는 상처는 어떤 것이 있을까.

첫째, 가족들이 나의 소유물을 자꾸 가져가는 거다. 식민지 국가는 이웃 나라가 와서 맘대로 가져가듯이. 서른 중반의 미혼 여성이 10년 이상을 유치원 교사로 일했지만, 집안의 빚을 갚느라고 모은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어머니는 관절염으로 일도 못하고, 아버지는 술만 마시니, 혼자서 가정을 지탱했다.

보기 드문 효녀이고, 미담일수 있지만, 정작 본인은 공허했다.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남을 도와주고 인정받는 외적 동기와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내적 동기가 있다. 가족에게 베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가 좋은 것을 하는 내적 동기가 훨씬 중요하다.

둘째는 차별이다. 부모님이 차별을 해놓고 차별을 인정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냐고 하시니, 차별을 당한 자녀는 자기감정에 혼란을 겪는다. 차이와 차별은 다르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고, 장남과 둘째의 역할이 다른 것은 차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로 인해서 불이익이 생긴다면 이것은 차별이다. 딸이기 때문에, 장남이기 때문에, 돈 잘 번다는 이유로, 또는 잘하는 게 없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차별이다.

셋째는 가족들의 간섭이 상처가 될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이 바라는 대로 결정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가족들이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고, 결혼을 반대하거나 종교를 금지하면, 자기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 것에 대한 한이 맺히게 된다. 그런 사람은 엉뚱한 데서 고집을 부리기도 하고, 혹은 늘 보호를 받아야만 되는 연약한 존재로 여기는 의존성 성격이 될 수 있다.

가족과 관련된 상처는 과연 치유될 수 있는가. 오래된 일이고 여전히 진행형이고, 빠져나올 길이 없는 것 아닌가 생각하지만, 이 부분은 치료될 수 있다. 말라가던 꽃나무도 키우는 사람의 정성에 따라 다시 소생하지 않는가. 가족 상처 치유의 첫 단계는 가족으로부터 정서적인 독립을 하는 것이다. 부모님의 감정을 분리해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모님은 싸우더라도 나는 불안하지 않고, 부모님은 화내지만 난 여유가 있으면 된다. 분가는 못하더라도 차분하게 정서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게 차별이었고 내가 결핍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었구나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차별이 아니야, 우리 부모도 얼마나 힘들었겠어. 라고 부인하다보면, 자기 자녀에게도 똑같은 차별의 상처를 대물림 하게 될 수 있다.

가족한테 받은 상처는 꼭 그 사람에게 사과를 받아야 치유된다고 집착하는 분들이 많다. 상호성의 원칙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방법은 쉽지 않다. 치유는 가족만이 아니라 내 주위의 좋은 사람들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비록 부모에게는 차별받았지만, 나를 사랑해주는 친구나 직장 동료가 있고 그들을 통해 내가 잘 자란 사람이란 것을 깨달아 나가는 것이다.

점차 상처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나의 과거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되고, 현실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 가파른 절벽에 피는 꽃이 흔들림에 유난히 민감하지 않은가. 꽃이 아름다운 것은 흔들리며 피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마지막으로 가족도 사회 생활하듯이 접근하는 게 좋다. 어릴 때 5형제의 막내로 항상 형들에게 맞으며 자란 중년의 의사는 고향과 등지겠다고 했다. 고향집에만 가면 어릴 때 별명을 부르고, 함부로 대해서 기분이 상했다. 어린 시절 막둥이지만 지금은 현실적인 위치에 맞게 예우해주고, 본인도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부모 형제를 상사를 대하듯 처신을 하면 서로 마음이 편할 것이다.

김성미 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어느 소설가는 모든 부모는 최선을 다하고, 모든 자녀는 상처를 받는다고 했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은 같은 병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