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의 인세이셔블 연극 리뷰] '현실정치와 역사인식의 전인철 식 은유', 극단 돌파구 <고목>

입력 2024-04-03 09:51:11 수정 2024-04-03 10:06:37

김건표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전인철 연출의 연극
전인철 연출의 연극 '고목', 극단 돌파구 김신중 씨 제공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동시대 담론과 논쟁을 극단 돌파구의 방식으로 용해(溶解)시켜 오고 있는 전인철 연출의 이번 작품은 해방 직후 발표된 월북작가 함세덕의 <고목>(1947)이다. 2023년의 마지막 작품 <키리에>(장영 작, 전인철 연출, 국립정동극장 세실)로 제60회 동아연극상 작품상을 받았을 때는 죽음과 삶 속에서 인간 영혼이 정화될 것만 같은 숲의 이미지와 신화적 공간으로 변주되는 전인철식 미장센과 이미지가 10m 높이의 검은 박스의 숲속의 집으로 표현되었다. 예수처럼 형상화된 주인공 엠마(유은숙 분)를 통해 죽음에서 생동의 삶으로 치유되는 인간의 영혼을 그려내 호평을 받았다. 김은성 작가의 3부작 <시동라사>(2007), <순우 삼촌>(2010), <목란 언니>(2012)로 연극적인 감각을 익힌 뒤, (2015), <노란봉투>(2017), <국부>(2017), <날아가 버린 새>(2019), <나는 살인자입니다>(2019), <순교>(2021) 이후 극장에서 전통적인 연극 구조로 탈연극화를 시도하고 있는 작품 중 <키리에>는 오브제, 퍼포먼스적 장면과 이미지, 등퇴장과 공간의 일원화, 배우들의 탈연기화 되어있는 몸의 감각적 표현을 보여주었는데, 표현방식에서 충돌되는 불협화음만 정돈된다면 전인철 연극 형식의 정점(頂點)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어찌 되었든 전인철은 극의 배경과 시공간, 장면전환과 등퇴장, 상황 안에 나열되어 있는 극 중 인물들을 점층적으로 무대와 구조로 나열하는 방식에서 동일구조로 묶는 방식으로 전환해 텍스트에 내포된 의미를 가공해 전달하는 방식을 취한다. <고목>은 80여년 전 희곡을 전인철의 형식으로 현재화하는 데는 성과가 있었음에도 희곡이 지닌 한계와 전인철의 연출 방식이 완전히 용해되었다고는 볼 수는 없다. <고목>은 해방 후 미군정 시대부터 제헌국회 정국에서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기까지 정치적 분열과 갈등, 친일청산과 좌우 이념 대립이 난무하던 1946년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함세덕의 <고목>이 이승만 대통령을 연상하게 하는 극 중 인물 '오각하', 영팔과 영팔의 처, 목에 혹을 달고 사는 지주 박거복을 통해 1940년대 해방공간의 좌우대립을 그려낸 희곡이라면, 전인철의 <고목>은 여전한 좌우 이념 갈등, 정치권력과 결탁하는 부의 욕망과 양극화, 친일잔재의 부가 세습되는 현실을 타격한 공연이다. 극 중 인물 박거복(김정호 분)은 특정 보수정치인 혹은 부가 세습된 재벌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고목>은 1940년대의 사회적 논쟁(농지개혁, 친일청산, 수립정부의 정통성)을 통해 지금의 대한민국 현실정치를 환기한다.

전인철 연출의 연극
전인철 연출의 연극 '고목', 극단 돌파구 김신중 씨 제공

◆친일 청산과 이념 갈등, 해방공간의 현재화

극의 시간적 배경은 해방 이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과 미군정의 국민동원령에 의해 국가재건이 시작되던 시기로, 좌우익의 분열과 대립이 극심한던 때다. 공간적 배경은 마당의 500년 된 은행나무를 잘 지키라는 선친과 조상의 유언을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박거복의 집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유례없는 대폭우로 마을의 수백 가옥이 물에 휩쓸려간 1946년 7월, 미군정 통치하에 당대 우익정치의 선봉에 서있던 오각하가 마을을 방문해 강연한다는 소문이 돈다. 거복의 처남 영팔(김민하 분)은 해방 후 일본 육군 창고 물품을 불하받아 떼돈을 번 돌쇠가 딸의 혼사 장롱 목재로 쓸 수 있도록 거복의 집 마당에 500년 이상 자리잡고 있는 고목을 3천원에 팔라고 한다. 청년단원 하동정(안병식 분) 역시 수해구제금으로 쓸 수 있도록 고목을 기부해 달라고 부탁한다. 공연은 초반부터 고목을 둘러싼 박거복과 영팔, 하동정, 노모, 박거복의 처, 마을주민들의 갈등이 하나씩 제시된다. 애국당의 당원(재정부장)인 자신의 토지를 지키기 위해 행자 목재로 화로와 장기판을 만들어 기부하기로 결심한 거복은 기부 의사를 밝히고자 노모(김은희 분)를 강연회에 보내지만, 노모는 오각하의 부인이 양국(洋國) 여자라는 이유로 기부를 하지 않고 돌아온다. 결국 애국당의 재정부장 직책에서 밀려난 거복은 홧김에 오각하에게 기부하려던 고목을 수재의연금으로 기부하게 된다. 마지막 장면은 마치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잘려나가는 고목을 붙들고 절망하고 있는 거복의 모습이다.

무대 공간 전체가 구분없이 박거복의 가옥, 길, 등퇴장로로 활용된다. 3막으로 쓰인 함세덕의 <고목>에서 장면 구성의 플롯 구조는 유지하되, 막과 장 구분의 전환을 연출적으로 제거했다. 80년의 시간을 돌아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의 무대에 선 함세덕의 근대극은 전인철식 연출 문법으로 막과 장, 등퇴장, 무대 공간의 구분 없이 '스트리밍'되듯 한 공간에서 연속적으로 제시된다. 함세덕의 극적 환영은 파괴되고 소외되어 서사극적 효과를 취하게 된다. 극장 공간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 무대는 한옥의 구조를 간략하게 선적으로 구현한 정방향(ㄷ) 구조를 취했다. 무대 뒷면 검은 윤기가 흐르는 박거복의 집은 고가구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옥의 툇마루처럼 가옥 하단부 삼면을 연결시켜 방, 길가, 마당, 등퇴장 공간으로 무대 전체를 활용했다. 무대 공간과 극의 구조가 이질적으로 충돌하지 않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분위기가 가능했는데, 거복과 500년 고목은 여전히 청산되어야 할 현재처럼 보인다.

배우들은 객석까지 퇴장로를 연장해 극 중 인물로부터 이탈한다. 또 극 중 인물로 유지되기보다 인물과 감정을 전소시켜 극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서술자처럼 장면에 개입하기도 했다. 때로는 무대 위 극 중 인물의 배우와 객석의 배우가 대화를 나누며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현실이 마주하는 것처럼 장면을 구성했다. 무대 정면 앞쪽으로 500년 된 은행나무 고목이 자리해야 할 공간에는 은행나무 대신 '검은' 모래더미를 쌓아놓았다. 마을 지주인 거복의 집 마당을 500년 동안 지켜온 은행나무는 대대손손 세습되고 친일로 유지되던 부(富)와 목에 혹덩어리를 붙인 거복의 검은 욕망을 상징한다. 그 때문일까. 전인철은 고목을 검은 모래더미로 대신하고 그 형체는 소멸시킨다. 친일로 유지한 대물림된 부와 권력을 향한 거복의 욕망에 다름 아닌 고목을 전인철은 작품을 관통하는 강렬한 은유적 이미지로 보여준다. 부와 권력의 욕망은 타인으로 소유되지 않고 있는 부재한 현실이다. 그것은 모래처럼 덧없이 흩어지는, 거복의 욕망으로만 존재하는, 타인(주변 인물)은 소유할 수 없는, 언젠가는 사라질 물질이기에 형체가 없는 허상이 되는 것이다.

전인철 연출의 연극
전인철 연출의 연극 '고목'에 출연한 김정호 배우, 극단 돌파구 김신중 씨 제공

◆ <고목>을 살려낸 배우 김정호의 연기

극이 진행되기 전부터 배우들은 몸을 풀거나 극 중 인물이 되기 전의 상태로 등장해 있다. 전인철은 최소한의 소도구와 오브제로 연극적 환영을 뭉개며 역사극 놀이처럼 해방 직후의 시간을 되돌린다. 간헐적으로 지문과 독백, 대사를 무대 앞에 설치된 스탠드 마이크로 증폭시켜 역사의 현장을 기록하는 것처럼 표현된다. 극은 함세덕의 <고목>의 플롯을 충실하게 쫓아가면서도 전인철의 연출형식으로 전환되는데, 애국가, 학생들이 외치는 선거구호, 마이크 설정과 무대와 객석을 허문 등퇴장, 특정 시간을 물화시킨 배우들의 의상과 장면전환의 놀이화로 <고목>의 시간을 현재화했다. 객석 2층에 코러스처럼 자리한 21세기의 청년들은 극 중 장면의 애국가를 따라 부르거나 선거구호를 외친다. 극심한 대립과 분열의 시대 애국가는 공허하게만 들리는데, 그런 풍경이 오늘날 대한민국과 다름 없음을 보여준다. 특히 거복의 몰락이 확실해지고 드디어 고목을 베어버리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21세기 청년들을 무대에 등장시켜 국민재판처럼 그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게 한다.

2막 중반까지 다소 느슨했음에도, 함세덕의 <고목>이 전인철 <고목>으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마을 내 절대적 부와 권력(자)의 욕망으로 형상화된 오색 이불보를 덮어 쓰고 고목이 베어 나가는 순간을 울음으로 삼켜낸 거복 역의 배우 김정호의 역할이 컸다. 고목으로 오각하 정치권력과 미군정에서 야심을 키웠던 거복의 심리적인 몰락으로 삼대를 지켜온 고목은 비로소 타인의 소유로 잘려 나간다. 삼대를 지켜온 고목이 잘려 나갈 때 검은 모래더미 위에 주저앉아 절규하던 거복, 권력이 사라지는 절망과 비참한 절규를 김정호 배우처럼 희비극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배우가 또 있을까. 김정호의 연기는 작품을 받치고 있는 고목이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좌우 갈등이 바닥을 드러내고, 막말과 소신 발언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들며 데드덕과 탄핵정국이 회자되는 선거철이다. 전인철의 <고목>은 민감하게 해석될 수도 있지만, 전인철의 <고목>은 거복의 집 마당에서 잘려나간 고목처럼, 친일청산과 역사적 과오가 청산되었을 때 대한민국 애국가가 하나 된 소리로 불려질 수 있기에 전인철은 <고목>을 통해 과거 역사의 잔재를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그것을 통해 대한민국의 미래를 희망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21세기의 젊은 세대가 바로 무대에 등장한 20대 청년들이란 점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