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라에서 꽃핀 민주정치 시민 참여가 핵심
아킬레스 무기 두고 병사 투표 실시…서양 문명사 첫 민주 의사결정 방식
B.C 462년 개혁 직접민주주의 채택…교양 시민 칼로스카가토스 시장 정치
소크라테스 VS 공자 만남 의미는?
지난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창신시장. 모처럼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족발집 앞에 선다. 먹성 좋게 족발을 입에 넣으며 시민을 만난다. 같은 시각 충청남도 천안의 중앙시장. 국민의 힘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구름 인파를 배경으로 호떡을 입에 물고 시민들에게 다가선다. 총선을 한 달여 앞두고 두 거대정당 지도자가 시장으로 달려가 족발에 호떡 먹방을 찍는다.
시각 미디어를 통한 이벤트 정치 시대라서 그럴까? 한국의 중장년세대에게 시장은 어머니 손 잡고 찾던 고향이자 추억이다. 단순히 정서에 호소하는 정치인가? 시장에서 오가는 말은 민심, 즉 여론을 낳는다. 여론을 듣고, 여론에 호소하는 시장정치의 기원은 어디일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지만, 민주정치의 원형은 아테네로 거슬러 올라간다. 너른 마당이자 시장 아고라(Agora). 아테네 아고라 민주정치의 본질을 살펴본다.
◆아고라(Agora) 판아테나이아 도로
식민지 시대 움츠렸던 한국인의 기상을 마음껏 세상에 떨쳤던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 쾌거. 이와 비슷한 느낌의 마라톤 쾌거가 실현된 곳이 아테네다. B.C490년 9월 초가을 마라톤만에 페르시아 대군이 닻을 내린다. 이에 맞선 아테네 시민병사들이 기적의 승리를 거둔다. 낭보를 아테네 시민에게 전한 시민 병사는 페이디피데스. 훗날 거리를 재보니 42.195km. 이를 기념해 1896년 올림픽 부활 때 마라톤 경기가 생긴다.
페이디피데스가 승리 소식을 안고 뛰어 들어온 길이 아직도 아테네 시가지에 오롯하다. 아테네 북쪽에서 중심지 아크로폴리스에 이르는 너른 길, 판아테나이아 도로다. 아크로폴리스에는 파르테논(Parthenon, Parthenos=숫처녀의, 전쟁의 수호신 아테나 의미) 신전이 우뚝 솟았다. 그 북쪽 산록 아래 판아테나이아 도로가 관통하는 너른 광장이 아고라다. 페이디피데스는 이 아고라로 달려와 승리를 알린 거다.
◆아고라 연설단 베마(Bema)-시민 민주주의 상징
아고라 유적지 입구에서 입장권을 끊고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판아테나이아 도로다. 도로에 서 멀리 정면의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을 바라보며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새물내 물씬 풍기는 길쭉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아탈로스 스토아(Stoa). 스토아는 지붕이 있고 한쪽으로 트인 기다란 복도다. 여름에는 뜨거운 햇볕, 겨울에는 비를 긋는 장소다. B.C3 세기 초 제논이 스토아에서 제자들과 학문을 논해 스토아 학파라는 말도 생겼다.
물론 제논이 공부하던 스토아는 이곳 아탈로스 스토아에서 약간 북쪽에 터만 남았다. 아탈로스 스토아 바로 앞에 인상적인 유적이 기다린다. 나무에 가려 자칫 지나치기 십상이다. 인류 민주주의 역사의 기원을 웅변하는 보석 같은 유적 이름은 베마(Bema), 연설용 연단(演壇)이다. 바닥보다 약간 높게 도드라진 모습이지만, 흙에 묻히기 전 B.C5세기에는 평지보다 높았을 것이다.
◆민회 열리면 시민들 아고라 이탈 금지
B.C 490년 마라톤 전투의 영웅 밀티아데스, B.C 480년 페르시아 전쟁 시기 살라미스 해전의 주역 테미스토클레스, B.C 5세기 중반 아테네 민주주의의 수호자 페리클레스, 아테네를 멸망으로 몰고 간 전쟁론자 알키비아데스... 아테네의 정치 지도자들이 베마에서 사자후(獅子吼)를 토해냈다. 영웅만이 아니다. 무명의 시민들이 표현의 자유를 만끽하며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동료 시민에 알렸다.
베마 앞 광장에는 많은 노점상이 섰다. 아테네의 많은 시민이 와서 물건을 사고팔던 시장이다. 다양한 관공서가 노점 뒤쪽에 병풀처럼 둘러섰다. 인류사 민주정치는 바로 시장에서 꽃핀 거다. 아고라 관광 안내지도를 보면 B.C5세기 시장터로 시끌벅적하던 당시 모습을 잘 보여 준다.
민주주의의 성패는 얼마나 많은 시민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정책을 논하며 투표에 참여하느냐에 달렸다. B.C5세기 중반 아테네 민주주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민회나 투표가 열리는 날 시장 아고라 밖으로 통하는 길목에 염료를 묻힌 천으로 줄을 만들어 걸었다. 시민이 정치현장인 아고라를 떠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시민참여가 아고라 민주정치의 핵심이다.
◆아킬레스 무구(武具) 주인공 투표 결정, 민주주의 효시
민주정치의 신화적 기원은 트로이 전쟁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스 연합군 최고 용장은 아킬레스다. 아킬레스가 절친 아약스와 장기 둘 때 수호여신 아테나가 지켜보는 장면은 2천500여년전 그리스 생활 도자기의 주요 소재였다. 아킬레스는 트로이 성벽을 기어오르다 파리스의 화살에 아킬레스건(腱)을 맞아 죽는다.
파리스는 트로이 왕자이자 헬레나를 유인해 트로이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장본인이다. 고대 그리스인은 시신을 수습해 깨끗이 염한 뒤, 화장해야 영생을 얻는다고 믿었다. 트로이성에서 쏟아지는 화살을 피해 성벽 아래 아킬레스 시신을 수습해 온 인물이 아약스와 오디세우스다.
아킬레스가 쓰던 창이나 방패 같은 무구(武具)를 서로 갖겠다는 갈등이 불거진다. 시신을 업어 온 아약스, 빗발같은 화살 속에 방패로 이를 엄호했던 오디세우스의 다툼이다. 아킬레스의 어머니인 바다요정 테티스가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에게 부탁해 만든 신의 무기, 아킬레스 무구를 누가 차지했을까? 수호여신 아테나는 병사 투표로 주인공을 가리라고 일러준다. 오디세우스의 승리로 갈무리된 병사 투표가 서양 문명사 최초의 민주적 의사결정 방식이었다.
◆B.C462년 에피알테스 개혁, 시민투표로 정책 결정
아킬레스 무구 주인공 결정투표를 이은 아네테 아고라 민주주의. B.C462년 절정의 꽃을 피운다. 아고라에서 열리는 민회가 국가의 법을 제정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제도. 직접민주주의 채택이다. 현대 민주주의는 대의(代議) 민주주의다. 시민이 공직자 즉 대통령이나 시장군수, 국회의원을 뽑는다. 이 선출직 공직자들이 법을 제정하고 정책을 정한다.
이와 달리 시민 손으로 법과 정책을 결정하는 제도가 직접민주의다. 이런 혁명적인 제도를 인류사에 선보인 주역이 에피알테스다. 선출직 공직자들이 갖던 입법권과 정책결정권을 시민에게 돌려준 때는 B.C462년이다. 지금도 인류사회에 이런 완벽한 직접민주주의를 구가하고 있는 나라는 없다. 부분적으로만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도입할 뿐이다. 이렇게 전무후무한 민주주의의 금자탑을 세운 에피알테스는 아테네의 영웅이 됐을까? 권력을 잃은 반대파에 이듬해 암살됐다.
◆아고라의 주역 칼로스카가토스의 교훈
아고라(Agora)는 그리스어 아고라조(Agorazo, '모이다', '장사하다')에서 나왔다. 시민이 모여 장사하는 공간이다. 그 위 아크로폴리스(Acropolis)는 도시(Polis)의 가장 높은(Acro) 꼭대기로 신의 공간이다. 사람의 공간 아고라의 주역은 건강하게 교육받고 건실하게 성장한 사람, 교양있는 아테네 시민 칼로스카가토스(Kaloskagathos)다. 칼로스(Kalos)는 '아름답다', 아가토스(Agathos)는 '지혜롭고, 덕이 있다'는 의미다.
가운데 'K'는 접속사다. 운동으로 단련된 건강하고 아름다운 신체, 고결한 인품을 갖춘 아테네 시민을 가리키는 합성어로 역사가 헤로도투스 이후 플라톤 등이 언급한 말이다.건강하고 품격 있는 교양 시민, 칼로스카가토스가 시장에서 펼치는 정치가 아고라 직접민주주의다. 그리스 정부는 아고라 한복판에 소크라테스와 공자의 동상을 세워 놓았다.
시민민주주의와 법치의 소크라테스, 어질고 덕이 있는 정치의 공자. 둘의 만남이 주는 울림이 크다. 2천500년 전 아테네 정치인도, 현대 한국 정치인도 시장을 정치의 뿌리로 삼는다. 한동훈과 이재명이 시장에서 극렬 지지자가 아닌 칼로스카가토스의 아고라 민주주의를 되새겨 보길 바란다.
역사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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