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의학(치의학)전문대학원제도(의전원)의 도입을 강력하게 추진하던 때인 2001년도 무렵의 일이다. 당시에 교육부의 고위 관리가 필자가 재직 중이던 치과대학의 교수워크숍에 참석해서, 전문대학원으로 전환하는 의(치)대에 대한 여러가지 지원방안을 제시하면서 기존의 의대나 치대를 의전원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
그 때 필자가 그 교육부 관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한 적이 있는데, "만약 의대가 의전원으로 전환된다면, 의전원 신입생들 중에 남자의 대부분은 병역을 필하고 입학할 것이기 때문에 장차 군의관이나 공중보건의 부족 사태가 초래될 우려가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이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그 교육부 관리의 답변은 "군의관 문제는 국방부 소관 사항이기 때문에 교육부 관심 사항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그 답변을 듣는 순간 필자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정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교육부나 국방부나 모두 다 같은 정부의 부처이고 의대 졸업자가 군의관으로 입대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병역제도인데, 의전원 전환을 추진하면서 군의관 수급 문제를 도외시 한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라고 생각됐다.
필자의 지적은 의전원제도가 시행된 후 군의관(공중보건의) 부족이라는 현실로 나타났으며, 뒤늦게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정부에서 '국방의학대학원' 설립 방안까지 거론하기에 이르렀다.
의전원제도는 군의관(공중보건의) 부족 문제뿐만 아니라 의료계가 이미 예측한 여러가지 부작용이 불거지면서 결국 2010년부터 폐지 수순을 밟기 시작해서 현재는 거의 유명무실한 제도가 되었다. 의전원제도의 실패는 현장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정부의 일방적 정책 추진이 빚어낸 대표적 정책실패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정부의 정책실패에 대해서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재발방지책도 논의되지 않는다는 것이 더욱 한심하게 느껴졌다.
요즘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필수의료인력과 지방의료인력의 부족 문제만 해도 그렇다. 필자가 대학을 졸업하던 1980년 당시에는 소위 메이저 과목이라고 일컫는 내외소산 과목의 전문의가 되기 위해서는 학교성적이 우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외과나 산부인과를 전공한 친구들 중에 지금까지 그 분야에서 활동하는 친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많은 친구들이 이미 오래 전에 진료분야를 바꾸었거나 요양병원에서 봉직의로 근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고위험 의술에 대한 의료수가가 너무 낮게 책정되어 있었고, 불가항력적 의료사고조차도 의사에게 과도한 보상책임을 지우는 사례가 빈발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의료계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원가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수술비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는다면 머지않은 장래에 필수의료분야의 붕괴가 초래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정부 당국자에게는 마이동풍이었다.
지방의료인력이 부족한 것도 수도권 인구집중과 지방의 공동화로 인한 농어촌 의료인프라의 붕괴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논란이 되고 있는 필수의료인력과 지방의료인력의 부족도 따지고 보면 현장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았던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금의 필수의료인력 부족 사태에 대해서 의료수가체계의 개선이나 소신 진료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의사보호장치의 마련과 같은 근본적인 해결책을 강구하기 보다는 의대정원 확대를 통한 의사수 늘리기에만 골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아서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이 문제를 국민여론조사와 같은 포플리즘적 여론몰이로 밀어붙이려는 것은 장차 초래될 더 큰 정책실패의 화근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의료분야 정책수립에 의료 현장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고 정부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기를 기대해본다.
최재갑 경북대학교치과병원 구강내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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