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종교에서 금지한 자살…안락사·존엄사, '불가피함' 정당화가 관건
"누구나 맘대로 자살해도 되나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회지도층이 언론에 오르내릴 때면 으레 주위에서 묻는다. 일단 "노!"라고 대답하면 다시 말한다. "왜요?"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인 대한민국이 고민하고 대답할 대목이다.
최근 절간에서 분신자살한 스님이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떤 뉴스에서는 존엄한 듯 미화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그 반대다. 문제는 이런저런 판단을 '누가' '어떤 기준'으로 하는가이다. 과연 자살은 개인의 권리이고 자유인가.
사람이 자살하는 이유는, 질병으로 고통받거나 경제적인 큰 곤란을 겪거나 인간관계나 개인사 또는 사업적 문제로 난관에 봉착했을 때 등 여러 가지일 것이다. 오죽했으면 귀한 목숨을 끊고자 했을까. 더 이상의 어떤 선택지가 없다는 판단에서 내린 결단이기에 흔히 '극단적 선택'이라는 말을 쓴다.
많은 종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자살을 금지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의 생명은 신의 것이라는 신앙 때문이다. 유대교에서는 인간의 삶과 죽음은 신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아 자살을 금지한다. 유대교의 법인 탈무드에서는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만 생사를 결정할 권리는 없다"고 했다.
기독교나 이슬람교, 그리고 불교에서도 모두 자살을 금지하고 있다. 철학자들도 여러 견해를 보인다. "자살을 인정한다면 국가적으로 손실이 된다"(아리스토텔레스), "자살은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니체), "자살은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은 미망이다"(쇼펜하우어), "자살은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행위이다"(칸트) 등등.
사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엔 자살을 그 이후에서보다 관용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런데 서양의 철학사에서 '자살은 살인의 일종이기에 죄'라는 논의를 제시한 것은 신학자이며 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는 예언자 모세의 십계명 가운데 "살인하지 마라"라는 조목이 자살에도 해당한다고 보았다. 그 이후 자살을 '죄'로 보았다. 사실 불교의 '불살생계'도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한편 '자살은 왜 죄인가?'에 대해 그 구체적 이유를 제시한 사람이 있다. 중세 유럽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그는 가톨릭 신학의 집대성인 『신학대전』에서 세 가지로 그 이유를 명시한다. 첫째, "자살은 인간의 자연스런 자기보존 본능에 위반하며, 누구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애덕(愛德)에도 위배된다." 둘째, "생명은 신으로부터 받은 선물이기에 자살은 신에 대한 범죄이다." 셋째, "인간은 공동체의 일부이므로 자살은 공동체에 대한 범죄이다." 이 논의는 서양의 자살론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이처럼 종교에서는 대체로 생명을 신성시하여 자살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의는 절박한 상태에서 자살밖에 택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구원의 방안이 되지 못한다. 어쨌든 예로부터 대체로 자살이 금기시되었으나, 한편 사회적으로 허용되고 찬양되는 수도 있다.
개인적인 이유가 아닌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한 자살, 즉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에서 말한 '이타적 자살'이다. 이것은 집단의 룰을 위해서 혹은 보다 나은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자살을 말한다. 역사 속에서 신이나 종교적 목적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순교' 행위를 흔히 찾을 수 있다. 최근 한 스님의 자살을 두고 조계종단에서는 자기 몸을 태워 부처 앞에 바쳤다며 소신공양이라 규정하였다. 그런데 과연 순교적 명분이 되는지는 짚어볼 대목이다.
자살을 논하는 경우 함께 살펴볼 것이 바로 안락사 문제다. 안락사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개인의 권한인가를 규정하는 '자기결정권'이 문제 된다. 자기결정권이란 헌법상의 권리로 인간의 존엄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개인의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에 전제된 개인의 '자기운명결정권'이다.
안락사에서는 크게 '적극적 안락사', '소극적 안락사'로 나눈다. 적극적 안락사는 육체적인 고통을 제거할 목적으로 약물 투여 등을 통해 직접 생명을 단축하는 경우이다. 소극적 안락사는 식물상태의 환자에 대해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연장하지 않기 위해 적극적 연명 조치를 하지 않고 죽음을 앞당기는 경우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독을 사용한 적극적 안락사가 인정되었다는 설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렇게 동서양에는 적극적 안락사의 예가 있다.
자살을 부정하는 기독교권에서는 당연히 오랫동안 안락사에 부정적인 견해가 우세했다. 하지만 1975년, 지속적 식물인간 상태였던 미국의 대학생 카렌 퀸란의 부모가 딸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인공호흡기 제거요청의 소송을 낸 사건을 계기로 안락사 논의가 활발해졌다.
해외에서는 안락사를 합법화한 곳도 있다. 물론 적극적인 안락사는 허용하지 않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면서 자연사를 맞이하는 소극적 안락사를 사실상의 '존엄사'로 정의하려는 나라도 있다. 소극적 안락사에 대해 자기운명결정권이 생명권보다 우선하는가를 두고 국내에서 법적 논란이 있긴 하다. 더 이상 회생 불가능일 경우 스스로 곡기를 끊어 자연사하며 자신의 존엄을 지키려 했던 우리 조상들이 생각난다.
어쨌든 안락사와 존엄사를 논할 경우, 환자의 알 권리와 자기 결정권, 충분한 정보 확보 등이 포괄적으로 고려돼야 한다. 죽음의 자기결정권이 치료비를 부담하는 가족을 위한 선택인지, 정말로 자기 자신의 존엄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그 '불가피함'을 어떻게 객관화, 정당화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인간 존엄의 문제는 인권 차원에서 논의돼온 긴 역사가 있다. 존엄을 지켜야 하는 의미는 사회 전체가 숙고, 합의할 사안이다. 목숨은 '스스로' 결정할 능동적 의미에 앞서, 생명의 외경 속에서 '저절로' 살려지는 수동적인 의미가 있다. 그래서 생명은 개인에만 머물지 않는 너른 차원의 근거를 갖는다. 인간의 자기운명결정권이 차선적, 제한적일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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