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 양식도 양식이거니와 "추위"를 막아내자는 유일무이의 불! 즉 불의 호적수 나무와 탄류가 어디 있으며 있다 하여도 그 수량이야말로 극소할 것인가는 사실이다. 생각건대 쓸쓸하기 짝이 없는 우리들 생활의 현실이다. 가정과 사회의 모든 면에 있어서 이와 같은 느낌을 가슴에 안고 있겠지만 이 괴로움을 이 땅 배움에 매진하는 학원에까지 옮겨 주어서야 될 것인가 하고 생각한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11월 25일 자)
'생각건대 쓸쓸하기 짝이 없는 우리들 생활의 현실'은 뭘까. '군색한 이 나라 학교에 겨울이 주는 고민의 시련'으로 기사 제목을 달았다. 해방 후 서민의 고달픔은 사시사철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식량부족으로 인한 굶주림과 물가 폭등 같은 민생고는 쭉 이어졌다. 게다가 겨울은 다른 계절에 비해 의식주의 고통이 더 했다. 입을 옷가지조차 변변찮은 상황에서 살을 에는 추위를 견뎌내는 것도 그중의 하나였다.
엄동설한을 탈 없이 넘기려면 불이 필요했다. 당시의 월동 연료는 목탄, 무연탄, 장작 등이었다. 무연탄의 원료인 석탄은 정치 상황의 격변으로 북한으로부터 공급이 끊기면서 물량 부족에 시달렸다. 해방 이듬해 대구시민에게 필요한 목탄은 약 5만 표(俵)였지만 2만 표 확보에 그쳤다. 장작은 소요 예상량이 7만 평이었지만 경북도의 각 산지에 있는 2만 평이 전부였다. 무연탄은 6만 톤이 필요했으나 10%인 6천 톤만 확보했다. 목탄을 세는 단위인 표는 섬을 말하고 장작의 평은 부피의 단어로도 쓰였다.
월동 연료의 부족은 일상 어디나 영향을 미쳤다. 적산이 대부분이었던 목욕탕이 줄줄이 문을 닫은 것 또한 같은 이유였다. 서민들은 데운 물로 몸을 씻는 것은 고사하고 따뜻한 아랫목에서 잠을 청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추위에 떨기는 집이나 학교나 마찬가지였다. 땔나무는 고사하고 불쏘시개조차 없다 보니 교실의 난로는 무용지물이었다. 급기야 여학생들이 나섰다. 교실에서 공부하기 위해 산과 들로 땔나무를 구하러 다녔다. 솔방울은 주워 치마에 싸서 학교로 가져왔다. 겨울에 주는 쓸쓸하기 짝이 없는 애절한 한탄은 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겨울에 맞닥뜨리는 소시민들의 한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찬바람이 스며드는 가을이 되면 대구의 셋방 값은 들썩였다. 집 없는 사람들은 겨울나기 걱정에 한숨을 쉬었다. 정부 수립 후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셋방 한 칸의 월세는 2천 원에서 최고 5천 원으로 두 배 이상 올랐다. 보증금 역시 3만 원에서 7만 원으로 급등했다. 도지방(전세방)은 5만 원에서 10만 원을 넘나들었다. 직종마다 차이는 있지만 5천~6천 원의 박봉을 받는 월급쟁이로는 감당하기 힘든 벅찬 액수였다.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주택난은 더 심해졌다.
'시내 소채(채소) 업자들은 손해를 초래하게 되는 경우가 있더라도 시민에게 공급하기 위함이며 시민의 생활 안정을 시키기 위함이니 취체(단속)에 대해 오해를 말아주기 바란다고 당국자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경찰 당국에서는 소채 조합장 이하 관계원들과도 경찰국과 타협한 바 있으니 만일 이것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조합원 이하 상인들에게 엄중 문책할 것이며 일반에서도 여차한 행위를 발견할 때는 국으로 신고해 주기 바란다고 윤 조사과장은 거듭 강조하였다.' (남선경제신문 1949년 12월 14일 자)
겨울 석 달은 추위와의 싸움 못지않게 먹을거리를 장만도 만만찮았다. 김장은 삼동의 반양식으로 여겨졌다. 김장의 원료인 무와 배추 등은 생산량에 따라 가격이 오르내림의 폭이 컸다. 1949년에 채소는 풍년이었지만 가격이 폭등했다. 대구 시내에서 배추 한 포기가 200원을 오르내렸다. 한해 전에 30원 안팎에서 6~7배 올랐다. 해방 이듬해 김장은 5식구 기준 3천 원 정도 들었으나 이태 뒤에는 1만 원을 훌쩍 넘겼다. 배추 도둑이 설칠만했다. 한해가 끝나가는 12월 중순이 되어도 김장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가구가 상당했다.
배추 등의 생산량이 늘었는데도 이처럼 가격이 폭등한 이유는 모리배로 불린 중간 업자의 농간 때문이었다. 경북에서 채소가 풍년을 이루자 다른 지역으로 반출하는 대신에 대구 시내로는 반입을 차단했다. 당시는 수송 지연으로 배급이나 수급이 원활치 못해 곡물 등 물가의 폭등이 잦았다. 모리배들은 이 같은 배급 난을 교묘히 악용했다. 경찰이 채소 업자들에게 정상적인 거래를 요구하며 단속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모리배들의 횡포에 시민들은 분노했다. 당국은 단속에 나섰다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시간이 지나도 모리배는 활개쳤다.
겨울이 되면 서민들의 고달픔은 가중됐다. 마땅한 땔감이 없어 벌벌 떨어야 했고 공부하는 교실을 데우기 위해 여학생은 솔방울을 주우러 산과 들로 나갔다. 채소 값이 올라 겨울의 양식인 김장을 포기하는 집이 한둘이 아니었다. 너나없이 서민들은 날씨보다 더 매서운 삶의 맹추위를 맨몸으로 버텨야 했다. 한 해가 저무는 섣달에도 송구영신을 새길 겨를은 없었다.
박창원 계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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