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츠부르크(Salzburg)에서 며칠을 보냈다. 이곳은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51)의 도시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모차르트를 사랑하는 사람들 같았다. 여느 여행자처럼 우리도 낮에는 모차르트의 흔적을 찾았고, 밤에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찾았다. 모차르트가 그토록 싫어했다는 잘츠부르크에서 모차르트를 찾다니, 역설적이었다.
잘츠부르크 구시가지 게트라이데 거리, 그 중심에 샛노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모차르트의 생가였다. 모차르트는 이 집에서 1756년 1월 27일 태어나 17세까지 작곡을 하며 지냈다. 건물 전체가 모차르트 박물관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모차르트 광장, 모차르트 동상, 잘츠부르크 대성당, 이 모든 것이 모차르트를 기억하고 있었다.
◆모차르트가 세례받은 잘츠부르크 대성당
잘츠부르크 대성당의 위엄은 압도적이었다. 장엄한 외관과 돔 구조의 초기 바로크 건축물이다. 이곳에는 모차르트가 세례를 받았던 세례반과 천사들에 둘러싸여 있는 거대한 오르간이 있다. 모차르트는 이곳에서 불후의 종교 음악 작품을 만들었다. 히에로니무스 콜레레도 대주교의 음악에 대한 무지, 개신교적 검소함과 경건함이 모차르트를 자극했다. 대주교와의 갈등은 고향, 잘츠부르크와의 파국(破局)이었다.
여기서 비롯된 고향과 불화를, 시인 주브는 〈모차르트 돈 후안〉에서 이렇게 적었다. "자신의 고향인 잘츠부르크에 대한 모차르트의 혐오감은 매우 강했으며 지속적이었다 …… '당신도 아시다시피…… 잘츠부르크가 내게 얼마나 혐오스러운지 모릅니다! …… 다른 곳이라면 어디든지 만족스럽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과 같이 아름다운 잘츠부르크에도 어두운 면은 있었다.
페스퉁스베르크(Festungsberg) 산 주위에 크고 작은 수도원이 있다. 우리는 모차르트 광장을 지나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유서 깊은 성 베드로 수도원(St. Peter's Abbey)을 향했다. 성 베드로 수도원은 성 루퍼트(St. Rupert)가 696년, 옛 로마 도시 유바붐(Juvavum)의 폐허 위에 세웠다.
최근 연구는 성 루퍼트(St. Rupert)가 수도원을 이곳에 세우기 전에 이미 작은 수도원 공동체가 여기에 있었고, 루퍼트는 그 수도원을 단지 확장했을 뿐이라고 한다. 성 베드로 수도원은 987년까지만 해도 잘츠부르크의 대성당 역할을 감당했다. 한때는 성 베드로 수도원 원장이 잘츠부르크의 대주교로 활동할 정도로 위상이 높았다.
◆중세 인문학 수업의 수도원
성 베드로 수도원은 중세 인문학 수업으로 널리 알려졌다. 수도원은 학생들에게 문학, 서법, 인쇄 분야의 기술을 가르쳤다. 특히 수도승들의 글쓰기 수업은 전 유럽에 알려질 정도로 유명했다. 그 당시 인문학 수업의 흔적이 수도원 도서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수도원 도서관에는 지금도 800여개 사본이 남아 있는데, 최초의 사본은 73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도원 도서관이 소장한 서적만 해도 10만 권이 넘는다. 성 베드로 수도원이 잘츠부르크를 문학과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불행히도 1127년 5월, 성베드로 수도원에 큰 화재가 일어나 초기 수도원 건물이 파괴되었다. 그 당시 수도원장이었던 발데리히가 로마네스크 양식의 웅장한 수도원을 다시 건축했다. 수도원 교회는 수 세기에 걸쳐 개조되었고, 교회 내부는 3개의 회중석을 가진 로마네스크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
수도원 건물은 구시가지 남쪽, 페스퉁스베르크 산 아래에 흩어져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 베드로 수도원 묘지 위를 걸었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묘지에는 예술가, 학자, 상인 등 명사들이 쉬고 있다. 수도원 묘지에는 잘츠부르크 역사가 숨을 쉬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과거를 돌아보게 한다.
수도원 묘원을 걷는 사람들은 역사가 말을 거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수도원 묘지와 맞닿아 있는 고딕 양식의 성 마가렛 교회(Church of St Margaret)는 죽음의 신비를 품고 있었다. 직사각형의 교회 건물, 하늘 높은 솟은 종탑이 자아내는 애잔한 모습은 죽음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성 마가렛 교회를 돌아 언덕을 올라가면 유명한 '카타콤'이 나온다. 페스퉁스베르크 산의 바위를 깎아 만든 동굴 교회(catacombs)다. 이곳은 초기 기독교인의 집회 장소였지만 이곳에도 몇몇 유명 인사의 묘지가 있다. '카타콤'의 역사는 후기 고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바위 동굴 곳곳에는 초기 기독교인의 삶의 흔적이 있다. 딱딱한 바위 동굴에서 영적 생활에 몰두했던 처음 기독교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카타콤'에서 교회의 원형, 처음 기독교를 생각했다. 처음 기독교는 세상의 눈에는 전혀 새로운 종교였다. 신앙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가난도 무서워하지 않았고, 금욕적 삶은 일상이었다. 그들은 단지 성경의 가르침을 따랐고, 남녀 구별 없이, 사회 계층 구별 없이 모든 신앙인들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쳤고, 그 길을 따르게 했다. 그들은 이 땅에서 하늘의 사람으로 살았다.
'카타콤'을 돌아 남서쪽으로 내려오자 당당하게 앉아 있는 성 베드로 수도원 교회가 보인다. 교회는 웅장하고 거대하다. 성 베드로 수도원 교회 전체를 카메라 렌즈에 담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단순한 바로크 양식의 외관, 밝은 회색의 외장, 잘츠부르크에 우뚝 솟은 돔형 지붕, 모든 아름다움이 한눈에 들어왔지만 끝내 사진으로 남기지 못했다.
수도원 교회 내부의 로마네스크 양식은 천년의 세월에도 옛 모습 그대로였다. 로코코 장식이 교회 안의 수많은 제단에 잘 반영되어 있었다. 제단 그림 중에는 18세기의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이었던 마틴 요한 슈미트(Martin Johann Schmidt)의 작품이 있다. 교회당에는 1609년에 볼프 디트리히가 기증한 거대한 르네상스 청동 촛대가 놓여 있었다. 오른쪽 통로에 있는 예배당은 요한 미카엘 하이든 기념관, 모차르트의 여동생 난넬을 기념하는 대리석 명판 등이 있었다.
수도원 교회의 천장은 화려했다. 소용돌이치는 바다 모양의 천장에 황금빛 덩굴이 덮여 있었다. 교회당 벽은 성경 내용으로 그려져 있어, 생동감이 넘쳤다. 교회당 중앙에 서자 천장과 벽에서 장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도 성 베드로 수도원은 음악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모차르트도 하이든도 이곳에서 음악 인생을 시작했다.
◆모차르트의 음악 세계를 열어준 창
모차르트는 성 베드로 수도원 교회에서 작곡도 하고, 지휘도 했다. 모차르트는 수도원장 하게나우어의 부탁으로 1769년 "도미니쿠스 미사"를 작곡했다. 수도원장 하게나우어는 그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모차르트가 14세에 작곡한 이 미사곡은 모든 사람들이 우아하다는 평가를 했다. 미사는 많은 사람들의 요청으로 2시간 넘게 진행됐고, 모차르트의 오르간 연주는 모두를 놀라게 했다."
잘츠부르크를 떠났던 모차르트는 1783년 고향에 돌아와 3개월간 머물렀다. 그때 모차르트는 성 베드로 수도원 교회에서 그의 기념비적인 "다단조 미사"를 지휘했다. 이 공연은 모차르트 생애 동안 유일한 미사 공연으로 남았다. 지금도 그때도 모차르트의 음악은 우리를 경이의 세계로 이끈다. 잘츠부르크 대교회든 성 베드로 수도원 교회든, 교회는 모차르트의 음악 세계를 열어준 창이었다.
모차르트는 개신교를 향해, 그들은 '하나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가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 했다. 그런 경멸에도 개신교의 대 신학자 칼 바르트는 천국에 가면 가장 먼저 만나고 싶은 사람은 모차르트라고 했다. 심지어 1955년 12월 23일 "모차르트에게 드리는 편지"를 썼다. "제가 당신께 감사드리는 까닭은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 음악을 들을 때면 언제나 –햇빛이 비칠 때나 뇌우가 울 때나, 낮이거나 밤이거나-저는 어떤 선하고 질서 있는 세계로 옮겨짐을 느낍니다."
칼 바르트 찬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는 바흐를 연주하고, 천사들이 자기들끼리 모여 놀 때는 단연코 모차르트를 연주할 것이고, 하나님도 매우 기뻐하고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프란츠 니메체크 교수의 말을 빌려 모차르트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낸다. "모차르트에게 한 번 맛 들인 사람은 다른 음악가들에게서는 만족을 느끼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나는 두 거장 –모차르트와 칼 바르트-의 품에서 세계는 어떻게 화해와 평화를 만들어지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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