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아랫목

입력 2023-11-14 20:18:42

김태진 논설위원
김태진 논설위원

1980년대 초반까지 전자레인지를 가전으로 갖춘 집은 드물었다. 겨울철 밥의 온기를 유지하는 건 아랫목의 몫이었다. 아랫목에 묻어둔 따신 밥과 계란찜은 밤늦게 퇴근해 늦은 저녁 식사를 하는 가장이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책임감과 권위였다. 향촌에서는 손님이 들면 아랫목부터 내줬다. 손님이라고 호의를 만끽하는 게 아니었다. 아랫목을 손으로 짚어 가며 집주인이 불을 제대로 지필 땔감은 갖췄는지, 체력은 여전한지 가늠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배려의 아이콘인 아랫목을 한국의 전통 주거 문화라 소개하는 까닭이다.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원장도 아랫목을 소재로 자신이 유교문화 영향 아래 자라온 한국인임을, 그 정서를 공유하고 있음을 오랜 기간 강조해 왔다. 2019년 한 프로그램에 김한길 전 민주당 대표와 출연해 "온돌방이 인생의 내비게이션"이라 말하는가 하면 최근에도 한 인터뷰에서 비슷한 말을 반복했다. "(대통령보다) 위로 올라가라는 건 월권이에요. (중략)…. 점잖아야 돼요, 사람이. 정도를 가야 돼. 나는 아랫목에서 컸어요"라고.

더불어민주당의 위성정당인 열린민주당 소속으로 비례대표가 됐던 김진애 전 의원이 13일 한 팟캐스트 방송에서 인 위원장의 "나는 아랫목에서 큰 사람"이라는 말을 희한하게 풀이했다. 그는 "아랫목에서 컸다는 건 항상 좋은 곳에만 있다는 뜻이다. 우리 속담 중에 늦게 온 사람이 아랫목 차지한다는 말이 있다. 좋은 자리만 찾아가겠다는 의미"라고 악의적으로 해석했다. 이중적인 태도라 힐난도 했다. 곤궁한 청해력이라 눙치기에는 심각한 곡해다.

이민자 출신 정치인을 겨냥한 비슷한 공세는 2014년에도 있었다. 일군의 세력들은 새누리당 소속이던 이자스민 의원의 '이주아동 권리보장 기본법' 발의에 치를 떨었다. 대한민국이 불법체류자로 가득해질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항의 전화를 하자고 선동했다. 인권 신장을 위한 법률안에 '좌표 찍기'로 맞선 이들을 보며 이 의원이 어떤 심경이었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아랫목에서 꺼낸 밥을 개다리소반에서 먹어본 이들을 피부색으로 재단해 이방인 취급하며 편을 가르는 건 고약한 폐습이다. 정쟁이 낳은 무지성에 애잔한 서글픔이 몰려온다. 또 하나의 가짜 뉴스가 이렇게 싹을 틔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