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가 여름 지나서 익으니
(胡桃經夏熟·호도경하숙)
떨어진 열매 앞뜰에 가득하여라
(零落布前墀·영락포전지)
벗겨보면 황금빛 탄환 들었고
(撞破黃金彈·당파황금탄)
쪼개면 옥설 같은 피부 있어라
(刳分玉雪肌·고분옥설기)
부드러운 맛은 개암과 잣보다 낫고
(軟味凌榛柏·연미릉진백)
달콤한 향기는 밤과 배보다 좋구나
(香甘邁栗梨·향감매율리)
본래부터 오랫동안 씹으면
(從來咀嚼久·종래저작구)
갈증도 다스릴 수 있다지
(枯涸亦能治·고학역능치)
〈『옥담사집』 만물편(萬物篇)〉
성종의 셋째 아들 안양군의 현손인 옥담공 이응희(李應禧)가 17세기 조선의 향촌 생활을 생생하게 담은 1천여 편의 시 가운데 하나인 「호두」다. 길지 않은 시에는 호두의 특성과 맛, 효능이 담백하게 담겼다. 호두나무는 언제 어떻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까?
◆고려 말 원나라서 들여와
호두나무의 원산지는 중동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중국 한나라 무제 때 대월지국에 특사로 파견된 외교관 장건이 흉노에게 잡혀 포로 생활을 하다 구사일생으로 귀국하면서 고국으로 가져왔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충렬왕 16년(1290년) 류청신(柳淸臣)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호두나무 묘목과 열매를 가져와 충청남도 천안시 광덕면 광덕사에 심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호두를 胡桃(호도)라고 썼다. '오랑캐 복숭아'라는 뜻이다. 호두 모양이 복숭아를 닮아 생긴 이름이다. 앵두와 자두의 원래 이름이 앵도(櫻桃)와 자도(紫桃)였으나 '앵두' '자두'를 더 많이 사용하면서 표준어로 자리 잡았듯이 '호두'도 마찬가지로 이름의 변천 과정을 거쳤다.
류청신이 호두나무를 들여오기 전에 이미 한반도에 그 나무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唐唐唐 唐楸子 皁莢남긔
(당당당 당추자 조협나무에)
紅실로 紅글위 매요이다
(붉은 실로 붉은 그네 맵니다)
혀고시라 밀오시라 鄭少年하
(당기시라 미시라 정소년이여)
위 내 가논 대 남 갈셰라
(아! 내 가는 곳에 남이 갈까 두렵구나)
〈『악장가사』 한림별곡 8장〉
고려 고종 때 한림의 여러 유생이 지었다는 「한림별곡」 제8장에 당추자가 나온다. 당추자(唐楸子)는 '당나라의 추자'라는 뜻으로 호두나무의 다른 이름이다.
◆임산물 지리적표시 59호 '김천호두'
조선 세종 때 발간된 『농사직설』에는 호두나무의 재배를 권장했고 특산지로는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를 꼽았다. 옛 문헌에 저장성이 좋은 구황작물로 호두가 나올 정도다. 조선 후기 서유구가 지은 『임원경제지』의 과실·나무 농사 백과사전 격인 「만학지」에는 호두나무의 자세한 재배 방법, 알맞은 토양, 가꾸기 등을 다루었다.
호두는 충청남도 천안의 명물로 통하지만 경상북도 김천도 생산지로 유명하다. '김천호두'는 산림청의 임산물 지리적표시(PGI) 제59호로 등록돼 있다. 김천은 국내 최대 호두 주산지로서 전국 생산량의 30%가 넘는 연간 320여t의 호두를 생산한다.
호두의 둥글고 딱딱한 껍데기를 까면 사람의 뇌처럼 생긴 알맹이(배유)가 나온다. 호두 속살에는 지방과 단백질, 당분이 많고 무기질, 망간, 마그네슘, 철, 비타민 등도 풍부하게 함유돼 웰빙 식품이다. 성장기 아이들의 두뇌 발달을 도와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잣, 밤, 땅콩 등과 함께 정월 대보름날 풍속인 부럼에도 빠지지 않는다. 이날 딱딱한 견과류를 깨물어 먹으면 한 해 동안 부스럼을 앓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다. 약을 구하기 어렵던 시절 호두 기름은 피부병에 좋은 민간요법으로 통용됐다.
◆북미 흑호두나무 대구에 있어
호두나무는 열매뿐만 아니라 목재의 재질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영어 이름 '월넛'(Walnut)은 세계적으로 고급 목재로 통용된다. 미국 원산의 흑호두나무(Black Walnut)로 만들어진 가구나 조각품은 예나 지금이나 인기가 높다. 흑호두나무 목재는 아름답게 광택을 낼 수 있고 나뭇결이 미세하게 도드라져 미끄럽지 않다. 목질이 단단하고 충격에 강하며 가공도 쉽다.
이런 이유로 19세기 중반에 손꼽히는 소총 개머리판 제작에 사용됐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비행기 프로펠러도 흑호두나무로 만들었다. 군수품으로 쓰임이 다양하니 2차 세계대전 무렵에는 급기야 양질의 호두나무가 고갈돼 미국 정부에서 개인 소유의 나무를 전쟁 물자로 기부하도록 독려했다.
늦여름 호두가 서서히 여물면 깨끗한 옷을 입은 사람들은 나무 아래 출입을 자제한다. 호두 겉껍질이 떨어져 옷을 스치면 거무튀튀하게 물들어 세탁해도 잘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원리를 이용해 호두의 겉껍질을 갈거나 발효시켜 염색약으로 사용한다. 섬유에 물들이면 초코우유색을 띤다.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군복도 흑호두나무 열매 껍질의 추출물로 염색했다.
이렇듯 쓰임새가 다양했던 미국 흑호두나무를 대구에서도 볼 수 있다. 국내에서 큰 나무가 그리 흔하지 않지만 대구 중구 동산동의 대구제일교회 앞마당에 한 그루가 터를 잡고 자란다. 낮은 가지가 사방으로 뻗은 유실수 호두나무와는 달리 큰 줄기가 곧게 자라서 '캐나다 호두나무'로 통한다. 이 나무가 언제 이곳에 심어졌는지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동산병원을 오가던 미국 선교사들이 들여와 향수를 달래기 위해 심지 않았겠나 하고 추측할 뿐이다.
◆한국 터줏대감 가래나무
경상도에서는 호두나무를 다른 말로 추자(楸子)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추자나무의 순우리말은 가래나무다. 호두나무와 형제 격인 가래나무는 한반도 추운 지방에서 잘 자라는 토종 나무다. 경북 북부 산간 지역인 청송, 봉화, 영덕, 울진 등에서 볼 수 있다. 경남 창녕군 부곡면 비봉리의 신석기 유적지에서 가래나무 열매 수백 개가 출토됐을 만큼 역사가 깊다.
중국에서는 황제의 시신을 감싸는 목관을 가래나무로 만들었고 이를 재궁(梓宮)이라 불렀다. 한자 梓(재)는 가래나무를 뜻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왕의 관을 재궁이라고 했지만, 가래나무로 만들지 않고 소나무의 가장 좋은 부분인 황장목을 추려서 만들었다.
추석 전후 조상의 산소에 성묘하러 가는 일을 추행(楸行)이라고 한다. 이 말은 후손들이 조상의 무덤가에 가래나무를 심은 데서 유래됐다.
조선시대에는 가래나무가 효자나무로 기록돼 있다. 조선 후기 임금들의 언행을 적어놓은 『일성록』에는 전국의 효자, 효녀의 일화가 있는데 함양에 사는 임운(林運)의 이야기에 가래나무가 나온다.
임운은 아비가 항상 종기를 앓았는데 입으로 고름을 빨아냈다. 아비의 상을 당해서는 상례 이상으로 슬퍼하여 몸이 여위었고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사는 3년 동안 호랑이가 와서 항상 지켜 주기를 마치 집에서 기르는 짐승처럼 하였다. 산소에 소나무와 가래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나무하는 아이들이 베지 말도록 서로 경계하면서 "이것은 임 효자(林孝子)가 손수 심은 것이다" 하고 말했다. 〈정조 13년 기유(1789) 윤5월 22일(정미)〉
불가에서는 가래 껍데기의 단단한 특성을 이용해 단주(短珠)를 만들었다. 가래 열매를 가지고 다니며 손으로 비비면 귀신을 쫓는다는 주술적 얘기 때문인지 옛 동네 어르신들의 손에는 반질반질한 가래가 있었다.
◆'흙수저' 류청신의 벼락 출세
우리나라에 호두를 처음 뿌리내리게 한 인물 류청신은 고려 말 충(忠)자 돌림 임금들인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이 통치하던 때에 승승장구한 인물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고려사』 '간신'(奸臣)전에 수록돼 있다. 류청신은 왜 간신의 오명을 쓰게 됐을까?
류청신의 집안은 '부곡'(部曲)에서 비천한 사람들을 관리하는 말단 지방 관리였다. 그는 신분의 벽을 뚫고 고려 최고 관직인 첨의정승(僉議政丞)까지 오르고 고흥부원군에 봉해졌다. 충렬왕과 아들 충선왕의 권력투쟁 와중에도 왕은 선위와 복위를 반복했지만, 유창한 몽고말 실력과 폭넓게 운신하여 왕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어 입지전적인 신분 상승을 이뤘다.
하지만 원나라에서 고려를 속령으로 편입해 달라는 청원을 올리는 '입성책동'을 하고 충숙왕 폐위 운동을 전개했다. 원나라에 있던 충숙왕이 고려로 돌아가자 두려워 귀국하지 못한 채 원나라에서 머물다가 죽었다.
그를 간신으로 꼽은 『고려사』의 결론은 간단하다. "류청신은 불학무지한 자로 임기응변하는 재간이 있었으며 세를 믿고 국권을 농락해서 나라에 해독을 끼쳤다."<『고려사』 권125 「열전」 제38>
류청신의 후손 류일영은 자신이 쓴 『신암실기』(信菴實記)에서 『고려사』 '간신' 편에 나오는 류청신의 '매국 활동'은 왜곡이라며 반론을 제기했다. ▷류청신이 죽은 뒤에 충숙왕이 영밀(英密)이라는 좋은 시호를 내렸고 ▷공민왕은 류청신의 손자 류탁이 진종사(眞宗寺)를 세워 그의 화상(畵像)을 봉안하자 향과 물품을 보냈으며 ▷당대 학자이자 정치가인 이색(李穡)이 지은 『진종사기』(眞宗寺記)에도 류청신을 충선왕과 충숙왕 재임 시절 13년 동안 재상을 지낼 정도의 명성이 있었던 인물로 평가한 점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고려 임금이 원나라의 부마로서 충성을 맹세했던 어지럽던 시절의 충신과 간신은 백지 한 장 차이로 갈렸다. 원나라의 입김에 따라 처지가 결정됐기 때문이다. 『고려사』를 개찬한 집현전 학자 정인지는 집필 과정에 '역성혁명'으로 개국한 조선의 정치적 입장을 역사관에 반영했을 것이다. 새 왕조를 세운 당위성을 역설하고 그들의 행적을 윤색하고, 전 왕조의 무능과 치부를 부각해 교훈으로 삼으려 했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결정을 둘러싼 논쟁을 보면 정치 진영에 따라 역사 인식이 달라도 너무 달라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나무칼럼니스트 chunghaman@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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