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후근 경상북도인재개발원장(한지정책연구자·정책학박사)
중앙·지방정부는 한지(韓紙) 진흥을 위해 한지 품질표시제 및 KS(한국산업규격) 등 각종 정책 추진뿐만 아니라 상당한 사업 예산을 투입했다.
2017년 1월부터 2021년 6월 말까지 문화체육관광부 등 7개 중앙 부처는 109억 원의 국고보조금을, 전주시 등 11개 시·군은 231억 원의 지방예산을 한지에 집행해 총 341억 원에 이른다.
그런데도 수록 한지 업체 수는 1996년 64곳, 2016년 22곳에서 2022년 말에는 19곳으로 감소했다. 연간 70억 원 상당의 예산을 썼음에도 한지 업체가 폐업하는 현상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일부나마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위 341억 원 중, 19개 전통한지 업체에 지원된 금액은 7억 원에 미치지 못했다. 결국 나머지 예산은 '한지가 아닌' 다른 곳에 쓰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정의(定義)는 어떤 말이나 사물의 뜻을 명백히 하는 것으로서 법률 제정이나 연구 등 대부분 일의 시작점이다.
하지만 중앙정부 차원의 '한지 정의'는 정립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중앙정부가 추진한 한지 실태조사와 연구용역에서는 '수입산 닥과 목재 펄프를 주원료로 만든 종이'도 포함됐다.
한지에 대한 정의조차 규정하지 않은 채 용역 사업이 진행된 것은 맞지 않다.
전통한지 업체를 보유한 6개 도 및 11개 시·군·구 중에서 한지 육성 조례를 제정한 곳은 전라북도·경상북도, 전주시·의령군·안동시 등 5곳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경북도를 제외한 전주시·의령군·안동시는 '전통한지'를 '국내산 닥나무 인피섬유를 주원료로 하여 전통적인 제조 방식으로 만드는 것'으로 규정하면서도, '해당 시군 한지'는 '지역에 주된 사무소를 둔 한지 제조업체가 닥나무 인피섬유를 이용해서 생산, 가공한 종이'로 규정했다. 지역 한지에서는 한지 핵심 요소인 '국내산 닥'과 '손으로 만든 한지'를 제외한 것이다.
2019년 6월 A시가 추진한 '크로아티아 풍경 사진 전시회'에 사용된 한지는 주원료가 100% 태국산 수입 닥이다. 이런 현상은 A시 한지 조례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필자는 한지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제안하며, 활발한 논의가 펼쳐지길 기대한다.
첫째, '전통한지'는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사용하던 재료와 제조 방식으로 만든 종이다.
구체적으로는 '국내산 닥을 주재료로, 천연 잿물과 식물성 분산제를 사용하며 닥 방망이로 고해, 티 고르기, 일광 유수 세척 및 표백, 흘림 뜨기 등 초지, 자연 일광 건조 및 도침 등의 전통 방식으로 만든 종이'이다.
둘째, '한지'는 국내산 닥을 주재료로 사용하여 손으로 뜬 종이다.
여기서는 부재료로 사용되는 잿물이나 분산제에 일부 화학약품 사용을 허용하되 충분히 세척한 중성지여야 한다.
셋째, '기계장치 이용 한지'는 고해 과정에서 비트 기계장치를 사용하거나 사람이 손으로 초지하기 어려운 대형 종이를 만드는 과정 등에 일부 기계장치를 사용하여 한 장씩 초지한 종이다.
넷째, '수입 원료지'는 수입산 닥과 목재 펄프 등을 주원료로 하여 만든 종이다.
한편, 경북도가 2019년 9월 제정한 한지 조례에서 의미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한지와 전통한지의 정의를 '국내산 닥으로 만든 고유의 종이'로 정립했기 때문이다.
경북도는 세계 최고의 종이를 만든 시원지로서 긍지와 자부심이 있는 곳 아닌가. 경북이 한걸음 더 나아가 한지 정책을 선도하고 대한민국 한지 발전을 위한 초석을 놓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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