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 정부로부터 거액 받은 대가로 이동휘 총리, 임시정부 공산화 추진
1920년 한인 무장부대 자유시 유인
편입 거부한 반공산주의 성향 부대 1700여 명 사살당하거나 강제 노동
홍범도 등은 반대 동료 참변에 관여…"혁명정권 협조 감사" 레닌 직접 선물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일제 시절 독립운동가, 그중에서도 항일 무장 독립투쟁에 앞장섰던 홍범도·김좌진·김원봉 같은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어 추앙한다.
그런데 항일 무장투쟁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상식으로 아는 내용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들이 발견되어 충격을 주고 있다. 최근 논란이 벌어진 정율성·홍범도가 대표적 사례다.
일제 시절 독립투쟁을 벌였다 하여 광주광역시가 100억 원이 넘는 국민 혈세를 퍼부어 기념사업을 벌이는 주인공이 정율성이다. 알고 보니 그의 독립운동을 입증할 어떤 근거도 없고, 6·25 때 남침에 앞장섰던 북한군 장교이자, 중국으로 귀화한 중공군 장교였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홍범도는 자유시 참변 당시 우리 독립군을 몰살하는 편에 가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육사 교정에 설치됐던 흉상이 철거되었다. 그렇다면, 자유시 참변이란 무엇이며, 홍범도와 관련된 의혹의 실상을 추적해 본다.
1917년 러시아에서 인류 최초의 공산혁명이 일어나자 이에 동조하는 적군파와,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파 간에 적백내전이 일어났다. 서구 열강은 공산혁명이 해외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백군을 돕기로 했다. 이를 위해 시베리아에 병력을 파병했는데, 가장 많은 군대를 보낸 나라는 일본이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적백내전에서 적군이 승기를 잡자 적군파의 레닌 정부는 1920년 가을 일본군을 시베리아에서 철군시키고자 다롄(大連)회담에 나섰다. 일본은 철군의 전제조건으로 연해주와 간도 일대에서 러시아 적군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는 한국인 무장부대의 해산을 요구했고, 레닌 정부는 이 조건을 수락했다.
레닌 정부는 상해 임정의 국무총리 이동휘에게 금화 100만 루블이라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제공하는 대가로 임정이 공산주의를 수용하고, 한국인 무장부대를 적군 산하로 편입시켜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의 지휘를 받는다는 비밀 공수(攻守)동맹을 체결했다(신효승, 「20세기 초 국제정세 변동과 한인 무장독립운동」, 연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8, 188쪽).
◆이동휘의 공작으로 한국 독립군 자유시 이동
이때부터 이동휘는 집요하게 임시정부 공산화 작업을 진행했다. 이동휘는 태극기를 폐지하고 푸른 천에 세 개의 붉은 별이 그려진 국기로 대체하고, 임정을 혁명위원회로 개편하여 시베리아로 옮기려 했다(마뜨베이 찌모피예비치 김 지음, 이준형 옮김, 『일제하 극동시베리아의 한인 사회주의자들』, 역사비평사, 1990, 106쪽).
이런 활동이 임정 내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제동이 걸리자 이동휘는 연해주와 간도 일대의 한인 무장부대를 러시아 영내로 유인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이동휘 세력은 소비에트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일본과 독립전쟁을 벌인다는 거창한 계획을 선포했다. 그리고 "한국 독립군이 대통합하여 단일 지도부를 구성하면 소비에트 정부가 무기와 군수지원을 제공키로 했다"면서 자유시로 유인했다.
이 소식을 듣고 연해주와 간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3,500여 명의 한국인 무장부대는 1920년 10월부터 1921년 초 일제히 자유시로 이동해 갔다. 자유시에 모인 무장 부대는 잡다한 세력의 이합집산이었다. 자유시 참변의 원인과 전개과정은 복잡하지만, 이를 단순화하면 한국 무장 독립군을 소비에트 적군 산하로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벌어진 내분이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추종세력은 소비에트 적군 산하로 예속에 거부감이 없었다. 반면에 민족주의 성향의 부대는 적군 산하로 편입을 거부하고 독자 행동을 하려 하자 레닌 정부는 이 부대에 무장해제를 명령한다. 소비에트 적군 편입에 저항하는 한국 무장부대의 해산을 위해 적군 병력 1,000여 명과 장갑차, 한국인 공산주의자 집단인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산하의 부대가 동원되었다.
◆자유시 참변 당시 홍범도의 행적
1921년 6월 28일, 적군 장갑차와 그들 편에 선 한국인 공산주의자 집단이 자유시 외곽의 수라세프카 평원에 주둔 중인 한국 독립군을 포위 공격했다. 연해주와 간도 일대에서 이동해 온 한국 독립군 중 절반에 해당하는 1,700여 명이 사살당하거나 강물에 빠져 익사하거나 포로가 되어 벌목장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형에 처해졌다. 사망한 독립군 유해는 자유시의 소벳 마을 앞쪽 공동묘지 근처에 묻혔다.
이들의 포위 공격 당시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홍범도를 비롯하여 지청천(이청천), 최진동, 안무 등도 적군 편입에 반대한 동료를 몰살하는 편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여러 학자의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모두 한국인이었기에 실체적 진실을 은폐한 채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 한국 독립운동의 흑역사인 자유시 참변의 '역사적 사실'이다.
레닌 정부는 적군 편에 섰던 한국 독립군을 고려혁명군 여단에 소속시켰고, 자유시 참변 직후인 1921년 8월 5일, 이르쿠츠크로 보내 적군(러시아 인민혁명군) 제5군 산하로 예속시켰다. 이때부터 한국 독립군은 공산주의 사상 교육을 받고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고려혁명군 제1대대장에 임명된 홍범도는 1922년 1월 코민테른이 주최한 제1회 극동 제(諸)민족대회에 한국인 무장세력 대표로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이때 홍범도는 레닌과 면담했는데, 레닌은 홍범도에게 "혁명정권에 협조해줘 감사하다"면서 러시아 화폐 100루블과 군복 한 벌, 홍범도 이름이 새겨진 권총을 선물로 주었다(장세윤,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 역사공간, 2017, 221~223쪽). 홍범도는 레닌이 하사한 군복과 권총을 죽을 때까지 정중하게 보관했다고 한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는 법이다. 소비에트 정부는 1922년 4월 13일, 고려혁명군 병력 중 절반 정도를 제대시켰고, 9월에는 "러시아공화국 영내에 주둔한 한인 부대의 임무는 완수되었다"면서 고려혁명군 해산을 명했다. 이로써 한국의 무장 독립세력은 연해주 일대에서 농장을 일구거나, 일부는 만주로 돌아가 유랑객이 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부대가 해산되자 홍범도는 1923년 8월 이만 근처 까잔린 구역 집단농장에서 농사와 양봉을 했고, 1927년 10월 소련공산당에 가입했다(당증 번호 578492번). 1928년 7월 항카호 부근으로 이주하여 '항카의 별' 콤비나트 지도자로 활동했다(장세윤, 앞의 책, 227~228쪽).
그는 1937년 9월 스탈린의 명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고, 1943년 10월 크질오르다에서 사망했다. 문재인 정부는 2021년 광복절에 특별기를 파견하여 홍범도 유해를 봉환해 와서 국립현충원에 안장하고 독립운동의 최고 영예인 건국훈장 대통령장(1등급)을 추서했다.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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