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재봉 ‘한국 사람 만들기’의 저자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앞으로 어느 지역이 전후 복구와 경제발전에 가장 성공할 것으로 예상하는가?'라고 누가 질문하였다면 '동북아시아'라고 답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유럽에서는 전쟁에 대한 책임과 반성, 처벌이 이루어지면서 적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독일이 모두 미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에 참여함으로써 공산주의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한다. '마셜 플랜'과 '유럽경제공동체'는 독일의 '라인강의 기적'과 프랑스의 '영광의 30년'으로 대표되는 전후 유럽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견인한다.
반면 동북아시아는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도 화해도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전후 처리에 실패한다. 더구나 2차 대전 종식과 동시에 시작된 냉전으로 한국과 중국은 처절한 이념 갈등과 내전 끝에 나라가 분단되는 아픔을 겪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 동북아시아는 놀랍게 발전한다. 아직도 남한과 북한이, 중국과 대만이 분단되어 있고 과거사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여 한일, 일중 관계가 주기적으로 곤경에 빠짐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한국, 대만, 중국이 순차적으로 경제발전에 성공하면서 동북아시아는 어느덧 세계경제의 '기관차'가 되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가능했을까? 동북아시아가 지정학과 이념 갈등, 역사를 극복하고 경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었다.
첫째는 미국이 동북아시아에 구축한 군사동맹 체제다. 미국은 6·25전쟁을 계기로 일미안전보장조약(1951년), 한미상호방위조약(1953년), 중(대만)미상호방위조약(1954년) 등을 체결함으로써 일본, 한국, 대만의 안보를 보장한다. 이로써 동맹국들은 경제발전에 매진할 수 있게 된다. 1970년대에는 중소 분쟁 중이던 중국의 안보도 보장함으로써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채택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준다.
동북아 번영의 두 번째 요인은 지정학, 역사, 이념을 거부하고 실용주의 노선을 밀어붙인 지도자들의 출현이었다. 미국의 안보 보장 속에서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한국의 박정희, 대만의 장징궈, 중국의 덩샤오핑 등은 과감하게 군비를 축소하고 경제발전에 올인함으로써 기적을 일으킨다. 이들은 모두 역사적 구원(舊怨)과 민족감정, 이념 갈등에 기반한 국내의 격렬한 반대를 묵살하고 이웃 '적성 국가'들과의 관계를 정상화한다.
한일 국교 정상화(1965년), 일중 국교 정상화(1978년), 한중 국교 정상화(1992년 8월), 양안 관계 정상화(1991년 11월)는 동북아 역내 교역량의 폭발적인 성장을 견인하는 한편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경쟁력 있는 분업 체계(supply-chain)를 구축한다.
그러나 최근 동북아시아는 역사와 이념, 민족주의와 지정학의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 중국의 시진핑, 러시아의 푸틴은 물론 한국의 좌파 정치인들과 지식인들도 경제발전과 지역통합보다는 민족주의, 이념, 과거사, 지정학, 전략적 경쟁을 강조한다.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북아시아에 안정과 번영을 안겨 준 미국 주도의 질서도 미국의 패권주의, 제국주의의 발로일 뿐이며 동북아 각국의 민족적 화합과 통일을 저해하고 과거사 해결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라고 비판하며 거부한다.
과거로의 회귀를 부채질하는 것이 북한이다. 북한은 시대착오적인 쇄국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가 혼재된 주체사상을 앞세우며 동북아시아의 지역통합과 경제발전 대열에 합류하기를 거부해 왔다. 이제 동북아시아가 경제발전과 지역통합 대신 역사, 이념, 지정학이 지배하는 세계로 회귀하기 시작하면서 북한은 러시아, 중국과 더불어 동북아를 분열과 반목의 시대로 이끄는 데 앞장서고 있다. 경제적인 '블랙홀'인 북한은 이제 지정학적인 블랙홀이 되어 가고 있다.
동북아시아는 기로에 서 있다. 한쪽은 지속적인 경제발전, 지역통합, 세계화의 길이다. 다른 한쪽은 무역 전쟁, 영토 분쟁, 군비 경쟁, 그리고 배타적 민족주의로 회귀하는 길이다. 역사와 민족주의, 지정학과 패권주의가 동북아시아의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엄습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동북아시아의 경제발전과 지역통합은 과연 어떻게 가능하였는지, 그리고 지금 어떻게 파괴되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대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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