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에 상소 통해 황제를 매섭게 꾸짖은 척암 김도화
한국국학진흥원, 22일 '척암 학문과 애국 활동' 학술대회
"아! 폐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시는 것입니까?(陛下何爲而爲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하자 안동 유생 척암 김도화(1825~1912)는 고종황제를 매섭게 꾸짖는 상소문을 올렸다. '절대 한일합방을 하면 안된다'(請勿合邦)는 상소였다.
"500년 역사의 왕위와 3천리 강토는 선대의 왕으로부터 이어받았습니다. 국가의 통치대권은 폐하의 사유물이 아니며 한 치의 땅도, 한 사람의 백성도 폐하의 사유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임금은 나라를 주고받는 일을 어찌 농사 짓는 자가 토지에서 난 곡식을 서로 매매하듯 합니까"라고 질타했다.
700자로 구성된 이 상소문은 고종과 고종의 뒤를 이은 순종에게 망국의 책임을 돌리며 욕설에 가까운 비판의 칼날을 휘둘렀다. 나라와 백성을 빼앗긴 임금은 더이상 임금이 아닌, 여염의 필부(匹夫)에 지나지 않는다고 통박한 것이다.
척암의 나이 86살이었다. 그리고는 집 앞에는 '合邦大反對之家'(합방대반대지가·합방을 크게 반대하는 집)이라는 현판을 걸고 스스로 가택연금 생활과 혹독한 감시 속에 살다가 2년 뒤인 1912년 88살을 일기로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한국국학진흥원 오는 22일 오후 2시부터 '척암 김도화의 학문과 애국 활동'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국역 성과물을 바탕으로 최영성 교수(한국전통문화대)의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이규필 교수(경북대), 정하정 교수(계명대), 한준호 박사(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강윤정 교수(안동대)가 주제발표자로 나서 김도화의 생애와 학문, 애국 활동 등에 대해 종합적으로 다룬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척암 김도화는 국운이 기울어가던 시기에 일제의 침략에 맞서 항거한 대표적인 유림이자 문장가였다.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두 달후에는 단발령까지 선포되자 이에 격분해 전국적으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안동 유생들도 의병 봉기를 단행했다. 그 중심에 김도화가 있었다. 1896년 2대 의병장으로 추대됐다.
김도화가 이끄는 안동의진이 2차 거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종이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김도화는 강력히 항의하는 상소문을 올리며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척암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 이후에도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을사늑약을 당장 폐기하라는 상소문 '청파오조약소'(請破五條約疏)를 올렸다. "그들을 용서하지 못할 죄가 셋 있으니 첫째는 나라를 팔아먹은 죄요, 둘째는 외적과 은밀히 통한 죄요, 셋째는 군부(君父·임금)를 협박한 죄"라고 썼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10년 8월 결국 국권이 침탈되자 척암은 고종 황제를 지칭하면서 "대체 황제가 뭐하는 사람이야"고 사정없이 꾸짖은 것이다.
한국국학진흥원은 척암 김도화의 비분강개한 정서를 담은 많은 시와 서간, 상소문 등이 수록된 문집 55권 29책을 '국학진흥 청년일자리 창출사업'을 통해 국역을 완료하고 올해 E-Book 형태로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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