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백강의 한국 고대사 ] 동양고전으로 다시 찾는 발해조선의 역사 (15)

입력 2023-07-30 16:26:34 수정 2023-07-31 17:56:17

"동쪽 땅 모퉁이에 살던 '우이'가 한국인의 조상"
태조 실록 등에 실린 주원장의 말말말 "동이의 국호 중 조선이 아름다우니 본래의
옛 명칭 사용하는 게 좋겠다" "단군 가신 후 왕조가 몇번 바뀌었나"
조선 국호제정 관련 주원장의 발언, 고조선은 중국과 무관하다는 입증

당나라에 의해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임명된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

◆북경 부근에서 건국한 최초의 국가 우이嵎夷의 발해조선

한반도에는 역사상에서 조선하나 조선성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1,000여 년 전 북경 북쪽에 조선하가 있었다는 '무경총요'의 기록은 북경이 일찍이 발해조선의 일부였음을 입증하는 움직일 수 없는 방증이다.

백이, 숙제의 나라 고죽국의 도읍지, 현재의 하북성 노룡현에 조선성이 있었다는 1,000여 년 전 '태평환우기'의 기록은 고조선의 발해유역 존재를 입증하는 결정적인 근거이다.

그리고 고죽국이 건국되기에 앞서 거기서 고조선이 먼저 건국하였다는 1,500년 전 '두로공신도비문'의 "조선건국 고죽위군" 여덟 글자는 '무경총요'와 '태평환우기'의 발해조선 기사가 역사적 진실임을 뒷받침한다. 이런 발해조선 자료들이 발굴되기 이전에는 '산해경'에서 말한 "발해의 모퉁이에 조선이란 나라가 있다"는 기록이 다소 허황하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발해유역 북경 부근에서 건국한 첫 국가는 고조선이란 것이 여러 문헌을 통해서 확실하게 객관적으로 실증되었다고 본다.
사실 우리가 그동안 사대, 식민사관에 눈이 가리어 고조선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뿐 고대 문헌은 이미 여러 가지로 그것을 입증하고 있었다.

예컨대 '서경' 요전편에는 "모퉁이에 동이족이 거주하는데 그곳은 해 뜨는 골짜기이다.(宅嵎夷 曰暘谷)"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여기서 말한 모퉁이에 사는 동이족 '우이嵎夷'가 바로 '산해경'에서 말한 발해의 모퉁이에 살던 고조선인을 지칭한 것이라고 본다.
먼 옛날 고조선사람들은 발해의 모퉁이, 지금의 발해만에 거주했다. 그래서 이들을 가리켜서 모퉁이에 사는 동이족, 즉 우이嵎夷라고 호칭했던 것이다.

당나라에 의해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임명된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

'산해경'에서 말한 발해의 모퉁이에 살았던 조선인, '서경'에 말한 태양이 치솟는 동쪽 땅 모퉁이에 살았던 '우이'가 바로 우리 한국인의 조상을 가리킨다는 것은, 당나라에서 신라의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임명한 데서 그 하나의 중요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북경을 최초로 중국의 정식 수도로 정한 것은 몽골족의 원나라지만 발해의 모퉁이 북경 부근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며 최초로 세운 나라는 우리의 선조 우이족이 세운 고조선이 분명한 것이다.

◆한반도의 한양조선은 발해유역의 발해조선을 계승했는가

얼마 전 '발해조선의 역사와 한국의 비전'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마치고 나오는데 어떤 젊은이가 다가와 "한반도의 한양조선이 중국의 발해조선을 계승했다는 근거가 있느냐"고 물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지 않았고, 고려는 한국사에 해당하지만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한다.
조선도 이성계가 한반도에 세운 조선은 한국사지만 고조선은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것이 동북공정 이론이다.

발해조선을 한국사로 취급하는데 반기를 든 젊은이는 아마도 동북공정을 추종하는 중국인 유학생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한반도의 한양조선이 대륙의 발해조선을 계승했다는 분명한 근거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태조 원년(명태조 홍무 25년) 이성계는 중원에서 태어나 주원장과 교분이 있는 중추원사 조반趙胖을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그의 즉위 사실을 알렸다. 조반이 귀국할 무렵 주원장은 "국호를 무엇으로 바꿀 것인지 빨리 알려달라(國更何號 星馳來報)"고 하였다.

이성계는 밀직사사密直司事 한상질韓尙質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조선, 화녕和寧 두 개의 국호 중 어느 하나를 재가해주기를 요청했다.
주원장은 "동이의 국호 가운데 오직 조선이란 명칭이 아름답고 또 그 역사도 오래되었으니 본래의 옛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東夷之號 惟朝鮮之稱美 且其來遠矣 可以本其名以仍之)"라고 말하였다.

이성계가 국호를 자주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중국 황제의 재가를 요청한 것은 우리 역사상 일찍이 전례가 없는 일로서 이성계의 사대주의를 반영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성계 조선의 정책 기조는 전제개혁, 숭유억불, 사대교린이었다. 사대가 국가 정책의 중요한 기조를 이루다 보니 국호를 중국 황제의 재가를 받아 결정하는 수치스러운 일이 발생한 것이다.

다만, 조선이란 국호를 재가하는 과정에서 주원장이 "동이의 국호 가운데 오직 조선이란 명칭이 아름답고 또 그 역사도 오래되었다."라고 발언한 것을 본다면 주원장은 고조선의 유장한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또한 태조 6년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주원장이 써준 어제시御製詩 가운데는 "단군 가신 지 오래인데 왕조가 몇 번이나 바뀌었는가(檀君逝久幾更張)"라고 말한 내용이 있다. 이는 주원장은 단군조선에 대해서도 상당한 이해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성계가 한반도에 세운 한양조선이 발해조선을 계승한 나라라는 것은, 국호를 조선으로 정해주며 "조선이란 본래의 옛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한 주원장의 발언에서 여실히 입증된다.

'태조실록'에 실려 있는 조선의 국호제정과 관련된 주원장의 발언은 고조선은 중국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역으로 입증한다. 한양조선이 발해조선을 계승했다는 것을 중국의 황제가 인정한 매우 객관적인 근거이다. 한국인은 우리가 오늘의 북경을 개척한 첫 주인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조선사는 한양조선과 발해조선으로 구분해야 한다

우리 학계는 그동안 왕조와 시대를 기준으로 조선사를 구분해 왔다.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을 고조선, 이성계 조선을 근세조선이라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구분법에 반대하고 대륙의 발해조선과 한반도의 한양조선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여긴다. 발해조선의 설정이 필자의 새로운 관점이다.

단군조선은 신화이고 기자조선은 허구이며 위만조선은 실재했다고 보는 것이 한국 반도사학의 통설인데 단군, 기자조선을 부정하고 위만조선부터 실재 역사로 인정하면 우리는 일본보다도 역사가 짧은 2,300여 년 역사를 가진 역사 후진국이 되게 된다.

어디 그뿐인가. 출발부터 중국 한족의 지배를 받은 열등 민족으로 전락한다. 그러므로 한국의 반도사학은 일본 식민사학을 계승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발해의 모퉁이 북경 부근에는 발해조선을 뒷받침할 조선하, 조선성이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대동강 유역에는 평양조선을 뒷받침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대동강 낙랑설과 평양의 단군릉은 후세에 조작된 것이다.

기자가 망명한 조선을 대동강 유역 평양으로 설정하면 그가 망명객 신분으로 당시 은나라의 서울 하남성 안양을 떠나 한반도 평양까지 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기자동래설이 허구라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일본은 항일전쟁기에 대동강 낙랑설을 주장하며 대동강 변 토성리에서 발굴한 유물을 그 근거로 내세웠다. 그러나 위만조선의 왕검성을 현재의 대동강 유역 평양으로 볼 경우,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공격할 때 대동강이 아닌 하북성의 "갈석산을 넘어와서 현도 낙랑군을 설치했다(東過碣石 以玄菟樂浪爲郡)"는 '전한서前漢書'의 기록과 배치된다.

단군조선은 발해유역에서 건국했고 기자가 왔던 조선도 발해유역에 있었으며 위만이 침공한 준왕의 조선 또한 발해유역이다. 이들 세 조선은 모두 발해유역에 있었으므로 한데 묶어 발해조선이라 표기하고 이성계 조선은 한반도의 한양에 있었으므로 한양조선이라 지칭하는 것이 옳다.

단군, 기자, 위만조선은 모두 발해유역에 있었고 이성계 조선만 한반도에서 건국되었으므로 발해조선과 한양조선으로 구분하는 것이 역사 사실에 부합된다.
조선사를 발해조선과 한양조선으로 나누는 새로운 구분법은 두 가지 면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첫째 발해조선과 한양조선으로 분류하면 그 명칭 상에서 이미 대륙사관이 명확하게 드러남으로써 반도사관을 혁파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둘째 발해조선이란 명칭을 사용하면 그것만으로도 우리 민족의 긍지를 드높이고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데 큰 효과를 가져다줄 수 있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