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진 이야기 하나. 어느 스님이 몽둥이를 들고 제자에게 물었다. "이 몽둥이가 있다고 해도 맞을 것이고, 없다고 해도 맞을 것이다. 아무 말 안 해도 맞을 것이다. 이 몽둥이는 있는가, 없는가? 자, 말해보라." 이래도 맞고 저래도 맞을 터, 제자는 그 상황을 어떻게 피해 갈까. 우리 삶에는 가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이 생긴다. 어쩌랴. 그냥 퍼질러 앉아 울까. 한바탕 웃고 얼른 자리를 뜰까.
"인간은 우주 한구석에서 방황하듯 암흑 속에 홀로 내팽개쳐져, 누가 거기에 데려다 놓았는지, 거기에 뭣 하러 왔는지,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지도 모른 채, 거기서 빠져나갈 방법도 없이 공포에 휩싸여 있다."고 파스칼은 생각했다. 대지 위 가장 연약한 생명, 인간을 그는 '생각하는 갈대'라 했다.
달빛 아래 조용히 울기도 웃기도 하는 이 갈대는 '물 한 방울' 만으로도 무너질 수 있다. 벌레에 갉아 먹힌 나뭇잎이 햇빛에 더 빛나고, 뜯긴 상처에 맺힌 빗방울이 더 영롱하듯, 눈물과 웃음은 인간다움의 맨살이다. 이를 통해 다듬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인간을 만난다. 철학자도 인간이기에 울고, 웃는다.
울음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공자다. 끔찍이 아꼈던 제자 안회가 죽었을 때 그는 아주 펑펑 울었다. 주위에서 놀라 "진짜 흐느껴 우시네. 어떡해?"하며, 수군댔다. 그러자 공자는 "그래 내가 진짜로 그랬냐?"며 몸을 추스르고, "내가 저 사람을 위해 통곡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위해 통곡하겠느냐"고 말했다.
애제자를 위해 실컷 울었던 눈물 속에는, 집 잃은 개처럼 세상을 떠돌지만 꿈을 못 펼치고 있다는 설움 조각 몇 방울도 섞여 있었으리라.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렇게도 벼슬자리를 찾던 공자. 아예 위 나라에다 베이스캠프를 치고 노력해봤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시 그는 황화를 건너 진나라의 실권자 조간자를 만나 포부를 실현하고자 강물 앞에 섰다.
그때 마침, 조간자가 진나라의 어진 두 대부들을 죽였다는 충격적 소식을 접한다. 결국 발길을 돌려야 했다. "아름답구나. 강물이여, 넘실대는구나! 내가 이 강을 건너지 못하는 것이 운명인가!"라며, 탄식했다. 눈물 맺힌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멀리 황하 건너편을 향하고 있었을 것이다. 공자는, 사람 사이에 태어나 사람과 함께 살다 떠나려는 인륜 지향의 철학자였다. 그의 눈물은 사람 곁에서 사람과 함께 살려는 탄원이었다.
"가거라…어떤 일이 있어도 너는 네 형들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한 대목처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숙제를 그는 품고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밀라노로 와서 살 때, 지난날의 삶을 참회하며 집 정원의 무화과나무 밑에 꿇어앉아 대놓고 울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흘린 소낙비 같은 참회의 눈물이었다. 이것은 지상이 아닌, 천상을 향한 것이다. 지상적 가치를 떠나지 않는 공자의 눈물과는 달랐다. 공자에서 발원하는 유교의 사유에는 여전히 지상적인 인간의 얼룩과 감정을 초극해 있지 않다.
예컨대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가 일본 코류지의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을 보고 "이 지상의 시간적인 속박을 넘어서 도달한 인간 존재의 가장 청정한, 가장 원만한, 가장 영원한 모습"을 발견했던 것처럼, 유럽적 사유에는 으레 지상을 뛰어넘어 천상을 향하는 초월의식이 두드러진다. 이에 비해 유교는 천상의 신이 아니라 지상의 인간을 추앙하려 한다.
퇴계의 경우를 보면 더더욱 지상의 연민에 붙들려 있다. "청량산 절 속에서 옛일을 추억하니/총각머리였던 것이 지금에 와선 백발이 되었네/학 등에서 굽어보니 산천은 몇 번이나 변했던고/남긴 시를 거듭 외며 눈물짓네." 여기엔 너무나 인간적인 '정(情)'이 버티고 있다. 그렇다. 유교가 걸어온 길은 웃음보다는 '눈물의 길'이었다.
그런데 울어야 할 때 울지 않고, 웃는 철학자도 있다. 도가사상을 대표하는 장자이다. 장자는 '인륜의 도'가 아닌 '천지자연의 도'를 표준으로 삼았다. 그는 아내가 죽었을 때 다리를 쭈욱 뻗고 편히쉬어 자세로 질그릇을 두드리며 대놓고 한판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참다못한 그의 친구 혜시는 논리학자의 본색을 드러내며 "어떻게 그 모양이냐"며 퍼부었다.
그러자 장자는 "죽음이 어째 슬퍼할 일이냐"며 한술 더 뜬다. "죽으면 원래의 고향,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니 오히려 기뻐하고 축하해줄 일 아닌가?" 장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생-로-병-사에 전혀 심각하지 않았다. 그 넷이 모두 평등하다고 여겼다.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처럼 생-로-병-사는 자연의 순환이니, 그 우열을 매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로 살지 말라고 조언한다.
천지자연의 변화에 모든 것을 맡기고, 나와 사물 양쪽을 모두 잊어버리라 한다. 생-로-병-사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꽃이 피었다 지듯, 그저 별일이 아님에도 그 하나하나에 붙들려 사람들은 호들갑을 떤다. 그냥 살아가는 대로 살면 된다. "한 가지 일이 일어나면 한 가지 해로움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천하는 항상 별일 없음[無事]을 행복으로 삼는다."는 『채근담』의 한 구절처럼 말이다.
과거의 기억, 바깥세상에 대한 기대, 미래를 향한 희망과 기획…, 그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은 없다. 아예 그런 생각의 그물망에 붙들리지 말 것을 당부한다. 사람들의 해석과 판단이 꼭 옳고, 맞다는 기준은 있는가? 없다. 그래서 세상의 흐름에 따라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된다, 다 맞고, 옳다!"는 것이다.
서양에도 장자와 같이 웃는 철학자가 있다. 몽테뉴다. 그의 『에세』에는 유쾌한 웃음이 배어 있다. 책 서문부터 웃게 한다. "이 책을 읽는 이여…타고난 그대로의 내 생김을 내놓았다…그러면 안녕"
우는 철학, 웃는 철학은 우리 삶의 한 풍경이다. '왜, 어떻게 살 것인가?'의 차이를 보여준다.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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