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규 계명대 교수
'구운몽'은 한국 고전소설의 백미로 꼽힌다. 물론 주인공 양소유의 과도한 여성 편력을 치명적인 흠결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 여덟 명의 미녀와 연애를 하고 그들을 2처 6첩으로 거느린다는 것은 아무리 조선 시대라 해도 지나친 남성 판타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피해의식을 토로하거나 신세를 한탄하는 여성은 한 명도 없다. 8명 중 6명은 양소유를 보는 순간 먼저 대시하고 5명은 그렇게 해서 당일에 잠까지 잔다. 그렇다고 뒤에 후회라도 하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이렇게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태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미와 지성과 유희성이다. 일찍이 F. 실러는 '미학 편지'에서 '인간은 유희하는 한에서만 온전한 인간이 된다.'라고 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유희 충동 혹은 미적 충동으로 파악했다. 1세기 전에 나온 '구운몽'의 여자들을 두고 한 말 같다.
진채봉에서 백능파에 이르는 여덟 미녀는 선녀였던 전생에 이미 끼가 다분했다. 이들은 육관 대사에게 심부름 왔다가 바로 돌아가지 않고 다리 위에서 노는데, 스님(성진)이 오자 길을 막고 이렇게 희롱한다. '도를 닦은 화상이라면 달마처럼 꽃잎을 타고 건너면 되지 길은 왜 비켜달라는 거예요? 호호호.' 이 다리 위의 스캔들 때문에 팔선녀는 다음 생에 인간으로 강등되어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유희 본능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양소유가 만나는 첫째 미녀는 양반집 무남독녀 진채봉이다. 그녀는 봄날 누각에서 낮잠을 자다가 시를 읊으며 산책하는 양소유와 눈이 마주친다. '그 풍채와 재주에 반하여' 즉각 유모를 보내 프러포즈한다. 즉석에서 왕희지 같은 필치로 연서를 갈겨 준다. 상대가 유부남이면 어떡하느냐고 유모가 반문하자, '그러면 소첩이 되어도 상관없지만 얼굴을 보니 아직 기혼은 아니다'라고 판단한다. 갑작스러운 전란으로 두 사람의 결합은 훗날로 미뤄지지만 분명한 것은 양소유의 연사(戀事)는 처음부터 여자가 주도한다는 사실이다.
양소유가 두 번째로 만나는 미녀는 낙양의 명기 계섬월이다. 그녀는 뛰어난 미인일 뿐 아니라 탁월한 문사이다. 그녀는 과거를 준비하는 선비들의 시회(詩會)에 참석하여 그들의 글을 비평하는데, 그녀가 1등으로 낙점하는 사람은 그해에 장원급제하게 되어 있다. 우연히 이 시회에 들른 양소유도 마지못해 한 자 쓰는데 그것을 본 계섬월은 그를 바로 자기 집으로 불러 운우지정을 나눈다. 더 나아가 화북의 명기 적경홍이 자기 친구라며 소개해 주겠다고 한다. 이들의 사전에 질투나 시기 같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적경홍은 연왕의 궁에서 양소유를 보고 첫눈에 반해 남장을 하고 따라붙는다. 나중에 계섬월을 만나 계섬월로 가장하고 양소유와 동침한다. 미모에 대한 자신감과 '인생이 별거냐' 하는 도전정신이 없다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양소유의 연인 중에 가장 화려한 유희를 선보이는 사람은 재색을 겸비하고 음악성까지 갖춘 정경패다. 그녀는 여 악사로 변장해 자기 안방까지 들어온 양소유에게 복수하기 위해 치밀한 연극을 구상한다. 장난 좋아하는 사촌(정십상)을 섭외하여 계곡을 무대로 만들고 미모의 시녀(가춘운)를 등장시켜 양소유를 유혹한다. 연극의 목적은 여자를 너무 좋아하는 양소유를 귀신과 교접하는 남자로 만드는 것이다. 목적은 쉽게 달성되나 양소유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 역시 놀이의 달인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공주로 변신해 양소유와 결혼한 정경패는 첫날밤을 치르고도 정체를 숨기며 양소유의 혼란을 즐긴다.
이처럼 '구운몽'의 나머지 여성들도 모두 주체적이고 유희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여자로서 피해자나 희생자라는 의식은 흔적도 없다. 언급한 것처럼 한 남자를 두고 서로 질투도 하지 않는다. 유사시 8인 1조의 팀워크를 유지하고 그 분위기는 늘 밝고 유쾌하다. '구운몽'의 진짜 주인공은 양소유가 아니라 이 여성 원팀(one team이다.
'구운몽'을 마지막 10장에 의지하여 제행무상이니 공사상이니 하며 불교적 메시지로 매듭짓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전체의 16분의 1밖에 안 되는 분량을 가지고(고등학교에서는 이 부분만 읽는 모양) 작품 전체를 채색하려는 것은 요령부득이 아닐 수 없다. 작품의 16분의 15가 아홉 명이 벌이는 지적·예술적 유희로 점철되어 있고 그 분위기가 구름처럼 자유롭고 낭만적이라면 그것을 허무로 뒤집기보다는 동경의 대상으로 남겨두는 것이 옳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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