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건국 했고 고죽이 임금 됐다…발해만 북대하 쪽 고조선 존재 증거
1500년 전 새겨진 모용선비족 '두로공신도비문'에
"조선은 기자를 봉분한 땅이고 고죽은 백이의 나라"
모용황이 발해유역에 세운 전연국 역사 설명 앞서
"고조선이 그 지역에서 최초로 건국했다" 직접 언급
◆발해조선은 언제 어디서 건국되었나
동양의 지중해인 발해는 산둥반도, 요동반도의 광활한 지역에 펼쳐져 있다. 발해유역에 조선국이 있었다면 드넓은 발해유역 어디에 도읍을 정하고 언제 건국된 것일까.
'삼국유사'는 고조선 조항에서 먼저 '위서魏書'를 인용하여 "4,000년 전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개국하여 국호를 조선이라 했다"고 했다.
'위서'는 남북조시대 북제北齊 사람 위수魏收(507~572)가 4세기말~6세기 중엽까지 존속했던 북위 왕조의 역사를 기전체로 저술한 책으로서 모두 12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위는 고조선의 후예인 선비족이 중원에 진출하여 세운 왕조이고 북제(550~577)는 고구려 고주몽의 후손 고양高洋이 동위東魏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정권이다.
그러므로 북제 사람 위수가 쓴 선비족 북위의 역사서에 단군조선 개국 관련 기사가 실린 것이고 일연이 이를 인용한 것이다.
일연은 다시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단군왕검이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 하다가 백악산 아사달로 도읍을 옮겼으며 주 무왕시대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고 했다.
일연이 인용한 '고기'는 구체적으로 어떤 기록을 가리킨 것인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세종실록'에 '단군고기'가 실려 있는 것을 본다면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일연이 살았던 고려시대까지는 여러 종류의 단군 관련 옛 기록이 존재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삼국유사'는 위만조선은 고조선에 포함하지 않고 별도로 취급하여 "연나라 사람 위만이 패수를 건너와 조선을 복속시키고 왕검성에 도읍했다"고 했다. 이는 한양조선에서 위만조선도 고조선으로 취급한 것과는 견해를 달리한 것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조선의 개략적인 건국 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단군조선은 약 4,000년 전에 개국 되었고 기자조선은 약 3,000년 전 서주 무왕시대에 출범했으며 위만조선은 약 2,000년 전 전한시대에 건국되었다.
'삼국유사'에서 고조선의 도읍지로 등장하는 곳은 아사달, 평양성, 장당경, 왕검성 모두 네 군데이다. 그러나 지금껏 4곳 중 어느 하나도 그 위치가 제대로 밝혀진 곳이 없다. 고조선의 첫 도읍지가 어딘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고조선의 발상지가 오리무중이다.
발해유역에 있었던 발해조선은 과연 언제 어디서 건국되었는지 그것을 고증할 방법이 있는가.
◆선비족 '두로공신도비문豆盧公神道碑文'으로 본 발해조선의 건국
'두로공신도비'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유신庾信(513~581)이 지은 것으로 북주 천화天和 원년(566)에 각자刻字되었다. 비문은 당연히 566년이나 또는 그보다 조금 앞서 저술했을 것이므로 이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1,500년 전의 자료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 비문은 현재 유신의 문집에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566년에 세운 비석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는 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비롯한 한국문헌 가운데 '두로공신도비'를 언급한 내용은 없다. 그래서 '두로공신도비'는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필자가 '사고전서'에서 찾아내 학계에 처음 소개한 '두로공신도비문'은 한국의 고조선사 연구에서 기념비적 가치를 지닌 매우 소중한 비문이다. 그 사료적 가치를 놓고 볼 때 고구려 광개토 호태왕비에 내리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반도사학이 고조선사의 세기적 발굴에 해당하는 이런 귀중한 자료를 모른 척하며 여전히 사료 부족 탓만 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다.
두로공(506~563)은 중국 남북조시대에 북주에서 농우총관부장사隴右總管府長史를 역임하고 태자소보太子少保에 증직된 두로영은공豆盧永恩公을 말한다.
여기서 두로는 성, 영은은 이름을 가리킨다. 두로씨는 원래 모용선비족 인데 후연後燕의 모용장慕容萇이 탁발선비 정권인 북위에 항복하자 두로라고 성을 하사했다. 두로는 선비족의 언어로서 귀순이란 뜻이다.
따라서 모용장이 두로씨의 시조가 되는 셈인데 이들은 뒤에 다시 노씨盧氏로 바뀌었다. '성씨심원姓氏尋源'에 따르면 북위 효문제 탁발굉拓跋宏이 태화太和(477~499) 초기에 조서를 내려서 두 씨를 노씨로 개정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노씨에서 대통령이 두 분이나 나왔는데 이들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용선비족 두로씨에 가서 닿게 된다고 본다. '두로공신도비문'에 의해서 모용선비족 두로씨는 한국인과 혈통이 같은 고조선의 후예란 사실이 밝혀졌다.
두로영은 즉 노영은에 관한 행적은 '주서周書' 및 '북사北史'의 '두로녕전豆盧寧傳' 말미에 비교적 상세히 기술되어 있어, 비문 내용과 참조하면 그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신도비문의 주인공 두로영은은 두로은豆盧恩으로도 불린다. 그래서 두로은비라 하기도 하고 또 그가 모용선비족이므로 모용은비慕容恩碑라 불려지기도 한다․
비문의 첫 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군君의 휘는 영은, 자는 모某, 창려 도하徒河 사람이다. 본성은 모용으로 연나라 문명제 황皝의 후손이다.(君諱永恩 字某 昌黎徒河人 本姓慕容 燕文明帝皝之後也)"
이 기록은 두로영은은 본래 모용선비로서 전연前燕을 건국한 모용황(297~348)의 후손이고 그가 태어난 고향은 중국 하북성 창려군으로 한국과는 아주 멀리 떨어진 곳임을 말해준다.
그런데 두로공 신도비문은 위의 내용 뒤에 바로 이렇게 이어진다. "조선은 기자를 분봉한 땅이고 고죽은 백이의 나라이다. (朝鮮箕子之封 孤竹伯夷之國)"
선비족 모용은 비문은 전연국前燕國을 건국한 모용선비의 지난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은나라 왕족 기자가 분봉되었던 고조선과 백이 숙제의 나라 고죽국을 언급하는 것으로 서두를 장식했다.
이는 발해유역에서 건국한 모용황의 전연국에 선행한 나라가 고죽국이고 고죽국에 선행한 나라가 조선국으로서 전연국은 고죽국, 고죽국은 조선국에 뿌리를 두고 건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문의 주인공 두로영은은 한양에 있던 이성계의 조선이나 고구려, 백제, 신라와는 전혀 무관한 인물이다. 그는 중국 하북성 창려군 출신으로 선비족 모용황의 후손이다. 그런데 두로영은의 비문에서 왜 우리 한민족의 고대 국가 조선이란 나라 이름이 맨 앞에 등장하는가.
이는 선비족이 우리 한민족과 피를 나눈 동족이자 전연국이 건국했던 발해유역에서 일찍이 조선국이 거기서 최초로 건국되었음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라고 하겠다.
◆발해조선은 발해유역 북경 부근 고죽국 지역에서 건국되었다
비문의 체제는 대체로 앞에서 비문의 주인공 행적을 서술하고 뒤에서 이를 다시 요약하여 명문銘文을 붙이는 형태로 구성되는데 '두로공신도비문'의 명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조선이 건국을 하였고 고죽이 임금이 되었다(朝鮮建國 孤竹爲君)"
이는 앞에서 언급한 조선국과 고죽국에 관한 내용, 즉 선비족 모용황이 발해유역에서 전연을 건국하기 앞서 고조선이 최초로 건국했고 고죽국이 이어서 임금이 된 역사적 사실을 여덟 글자로 간단히 요약한 것이다.
발해유역의 하북성 창려군 출신 선비족 '두로공신도비문'에 등장하는 '조선건국 고죽위군'이라는 여덟 글자는 고대 조선이 발해유역, 발해유역 중에서도 특히 고죽국이 있던 발해만의 하북성 진황도시 북대하, 노룡현 일대에서 건국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금석문 자료라고 본다.
모용선비가 세운 전연국前燕國은 발해유역에서 건국했고 조양朝陽에 도읍을 정했다. 전연국의 역사를 설명하기 앞서 "조선이 그 지역에서 최초로 건국했다"고 잘라 말한 '두로공신도비문'은 조선의 발해만 건국을 간접적이 아닌 직접적인 방식을 통해 언급했고 심증적으로가 아니라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역사학박사·민족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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