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양호 한국산업기술보호협회 회장
이젠 기술 패권 시대다. 세계 각국은 반도체, 배터리, 디스플레이 등 첨단 산업기술 개발을 통한 우위 선점이나 초격차 유지와 같은 전통적 전략 외에도 기술 탈취, 공급망 재편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자국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경쟁을 치열하게 펼치고 있다.
미국의 반도체 분야 공급망 재편이 대표적 사례이다. 대외적으로 국가안보라는 이유를 내세우고 있지만 이는 중국의 핵심 기술에 대한 접근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불법적 기술 탈취를 방지하기 위한 기본 포석이다. 이에 따라 국가 간 합종연횡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우리도 현재 상황을 분석해 대응책을 마련해야 할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이스라엘과 함께 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가 세계 최고인 나라이다. 정부 R&D 투자 30조 원에 민간 투자를 합치면 국가 전체의 R&D 투자 규모는 연간 100조 원에 달한다. 그 결과 반도체, OLED, 이차전지 분야 등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향후에도 기술 R&D 자금의 성과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혁신적 제도 개편이 있어야 하겠지만, 이에 못지않게 개발된 핵심기술을 효율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노력도 병행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정부에서는 '산업기술보호법'을 제정하여 총 13개 분야, 75개 주요 기술을 국가 핵심기술로 지정하고 실태조사, 보호조치, 기술 수출 및 M&A에 대한 사전 승인·신고제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2012년 이후 10년간 산업기술 해외 유출 적발 사례는 총 247건이며, 이 중에 56건은 국가 핵심기술로 밝혀졌다. 최근 반도체 공장 설계를 빼돌려 중국에 삼성전자와 똑같은 복제 공장을 만들려고 시도한 사례가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는데, 정말 이 정도까지일까 하는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국내외 산업현장에서 국가 핵심기술의 유출 및 침해 형태는 점차 다양화되고, 그 방법은 계속 고도화되고 있다. 그럼 어떤 방향으로 현재의 산업기술 보호제도가 보완되어야 할까. 필자는 다음 세 가지 방향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현행법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국가 핵심기술의 수출 및 인수합병에 대한 승인·신고제도와 관련된 부분이다. 각종 규정을 현실에 맞게 대폭 보완하여 제도의 실효성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글로벌 시장 변화에 대응할 수 있도록 수출이나 인수·합병(M&A)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승인·신고 절차를 간소화할 필요가 있다. 이는 대상 기관에 최대한 편리성을 높이고, 비용 부담을 덜어 주는 방법이다. 물론 부정한 수출 행위에 대한 제재는 강화해 나가야 할 것이다.
둘째, 국가 핵심기술 보유 기관의 보안 역량을 높이는 노력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현재에도 전문가 보안 진단, 기술 보호 설비 구축, 보안 교육 등을 실시하고 있으나 체감도는 낮고 자원은 부족한 실정이다. 국가 핵심기술 보호의 필요성은 높으나 보안 역량이 약한 중소·중견기업, 대학에 대한 맞춤형 지원제도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젠 R&D 지원비의 일정 비율을 보호 시스템 강화에 사용해야 할 시점이다.
마지막으로 국가 핵심기술의 유출 방지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높이고, 기술 유출자에 대한 적절한 수준의 처벌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일이다. 이제 국가 핵심기술 유출은 기업 차원의 문제를 넘어 국가안보, 국민경제적 피해 측면에서 접근되어야 한다. 중소·중견기업 CEO나 담당 직원에 대한 상시적 보안 교육은 국가적 책무로서 이제 우리가 당연히 지불해야 할 비용이다. 또한 대부분의 기술 유출은 이직을 원하는 직원, 재취업을 시도하는 퇴직 직원, 협력 회사 직원 등 상당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처벌 기준 강화를 위한 법 개정이나 양형 기준의 변화와 같은 제도적 개선 없이 국가 핵심기술 유출을 막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R&D 투자를 통한 국가 핵심기술 확보는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개발한 첨단기술이 한순간의 방심으로 경쟁국에 넘어가 기술 격차가 무너진다면 그간의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이제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전에 국가 핵심기술 보호를 개발과 같은 수준으로 관리하고 지원해 나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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