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처럼 일해 성공…건축으로 자리 잡고 '봉사하는 사람' 선언
"제 행동 좋은 에너지 되어 기부문화 확산 되길"
김윤철 서광산업 회장의 모든 길은 봉사와 기부로 통(通)한다. 누군가가 자신의 직업을 물으면 '봉사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세상은 그를 '기부왕(王)'이라고 부른다. 10대에 경북 달성 두메산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개미처럼 일해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 경제적으로 자리를 잡은 뒤에는 일관되게 봉사와 베품, 헌신의 길을 걷고 있다. 김 회장은 "기부는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이라며 꾸준하고 지속적인 실천을 강조했다. 고향의 젊은이들에게는 "너무 높은 곳만 쳐다보지 말고 현재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 성공 한다"고 응원했다.
-봉사를 고집하는 이유는?
▶23세 때 결혼했다. 그 때 서른까지 애들 낳고 50대를 끝으로 일을 마무리한 뒤 사회봉사 활동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다들 당시에는 고생을 많이 했다. 이제 저의 직업은 '봉사하는 사람'이다. 잘 나가는 분 대신 어렵고 힘들게 사는 이웃에게 손을 먼저 내밀고, 경청하고, 대화를 하는 게 즐겁다. 봉사를 하다보면 몸도 마음도 맑아지고 편안해진다. 그런데 기부라는 게 꾸준히 오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임종을 앞두고 전 재산을 사회에 돌려주는 것도 훌륭한 일이지만 규모가 작더라도 평소에 지속적으로 실천해야 의미가 더 커지지 않을까.

-그래도 재력이 뒷받침돼야 할 텐데.
▶건설과 부동산임대업을 주로 하고 있다. 직함은 서광산업 회장이다. 1980년대에 첫 발을 뗐으니 40년이 넘었다. 17세 때 상경해 처음에는 직장 생활을 했고, 의류 사업을 해봤다. 이런저런 일을 벌이다가 개발지역인 이곳(관악구)에 정착하게 됐다. 그런데 돈이 조금씩 생기면 땅을 샀다. 자연스럽게 건축 쪽에 눈을 돌리게 됐는데 그러다 보니 부동산에 관심을 갖게 됐고, 오늘에 이르게 됐다.
-삶과 경영 철학은?
▶초등학교는 그럭저럭 졸업했는데 중학교는 두 군데나 옮겨 다녔다. 등록금을 내지 못한 탓이었다. 가난이라는 게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깨달았다. 사업가라면 부지런한 게 첫 번째다. 새벽 4시면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한다. 또 욕먹을 행동을 하지 말고,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 한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근면·성실로 열심히 일하고, 약한 사람을 돌보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생을 개미같이 일하고, 무언가 모르게 남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게 철학이라면 철학이다. 제가 좋아하는 말이 봉사와 섬김, 기부 같은 것이다.
김 회장이 서울로 올라오기 전 아버지가 논 한마지기(약 660㎡)를 팔았다고 한다. 그리고 절반으로는 소를 사고, 나머지는 아들 손에 쥐어 주었다. 상경 초기 혹독한 고생을 하면서 그 기억을 잊지 않은 김 회장은 돈을 조금이나마 모으면 부동산을 매입했다. 아버지에게 논을 다시 사드리고자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면서 자신 보다 어렵게 사는 이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50년 가까이 이어지는 선행(善行)의 원천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주변에서는 우리나라 최고의 기부왕이라고들 한다. 후원한 명단과 금액을 정리하면 책 한권 분량으로 모자랄 것이라는 게 관악구청 관계자의 귀뜀이다. 더 가치가 있는 건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꾸준하게 실천한다는 점이다. 관악구 복지후원회를 만들어 책임진 게 23년이 지났는데 지금껏 회장이다. 특히 기부 바이러스 확산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 다른 고액 기부자와 달리 언론을 기피하지 않는 것은 기부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서다. 또 동아꿈나무재단에 271회에 걸쳐 5억 원 넘게 전달해 최고액 기부자로 이름을 올렸다. 교수인 아들을 향해 학생들에게 커피라도 한 잔씩 사라고 하는 성격이다.

-체육 활동을 봉사와 연계 시키는 게 특별해 보인다.
▶대한산악연맹 산하 관악산우회를 16년 이끌어 왔다. 회원들과 산을 오른 게 800회가 넘는다. 그러면서 양로원·불우노인수용시설·지체장애인시설처럼 소외된 이웃을 찾아 위문하고, 생활용품·위로금 등을 지원하고 있다. 산행을 할 때 1인당 회비에서 1천 원씩 기부에 적립시켜 호응을 얻었다. 또 관내 장군봉 조기체조 회장직을 1986년부터 맡아 매년 어버이날 행사로 1만3천명의 노인에게 잔치를 해드렸다. 배드민턴 관악구연합회 회장과 서울시연합회 회장을 했는데 대회가 열릴 때 장학금을 내놓았다. 규모를 떠나 기부를 생활화하자는 신념에서다.
-기부에도 노하우가 있을까?
▶규모를 떠나 꾸준하게…. 나는 소득 중 세금과 생활비를 빼고는 기부하거나 봉사에 쓴다. 그런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뭉칫돈 대신 매월 정한 기간에 자동이체 되도록 하고 있다. 상황이 달라지면 그 핑계로 기부 액수를 줄이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않을까 해서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제2의 고향이 관악구다. 50년을 살았고, 삶의 기반이 잡히다 보니 봉사의 기회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제 저의 행동이 좋은 에너지가 되어 기부문화가 확산됐으면 한다. 마음만 먹으면 저처럼 누구나 기부를 할 수 있다. 훈장을 받을 때면 살아온 가치를 인정받은 듯해 고맙다. 잘난 분 한 번 만날 시간이면 힘들어하는 사람 두세 명을 만날 수 있다. 지금껏 그래왔듯 앞으로 그들의 손을 더 따뜻하게 잡아주고, 들어주고, 마음을 나누며 돕는 일을 적극적으로 하고자 한다.
-하루 일과가 궁금하다.
▶새벽 4시면 일어난다. 5시 20분 뒷산 장군봉에서 국민체조를 한다. 한 50년 됐다. 그리고는 밑에 있는 배드민턴장에서 7시 30분까지 땀을 흘린다. 집에 돌아오면 8시 30분이다. 그렇게 하루를 연다. 나는 '8학년'(80대)지만 100세 이상 살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 만큼 일을 열심히 했고, 봉사도 운동도 많이 했다.
-고향에는 더러 가시나?
▶자주 찾는다. 지난 3일에도 갔다가 다음날 돌아왔다. 지난 4월 코로나19로 중단된 유가읍 체육대회를 3년 만에 열었다. 500명 넘게 참석해 대성황을 이루었다. 고생한 임원들에게 밥이나 사려고 갔는데 제 손녀가 미국의 명문대에서 건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내용의 축하 플래카드가 걸려 있어서 놀랬다.
-대구경북의 젊은이들에게 격려와 희망의 메시지를 부탁드린다.
▶너무 높은 데 쳐다보지 말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아 성실하게 하다 보면 얼마든지 성공하지 않겠나. 좋은 대학 나오지 않고도 현장에 뛰어들어 일을 열심히 하면 공장장이 되고, 오너도 된다. 빵을 굽다가 제과점 사장이 될 수 있는 세상이다. 중·고교만 졸업하고도 본인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다. 희망을 갖고, 자신감을 갖고 뛰라고 말하고 싶다.

◆김윤철 회장은 누구
80대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활력이 넘치는 김윤철 회장에게는 아쉬움이 하나 있다. 등산이나 배드민턴을 함께 할 동갑내기가 없어서다. 김 회장의 건강과 열정을 따라올 친구들은 찾기 힘들다. 고향인 대구 달성군에 다녀올 때도 직접 핸들을 잡는다.
재경달성군향우회장을 맡고 있다. 유가청담장학회 이사장으로서 장학기금으로 6억원, 폐교위기의 모교(유가초등하교) 음악당 건축비 1억원을 쾌척했을 만큼 고향 인재 육성에 힘을 쏟고 있다. 의성김씨 대종회 회장을 지냈다.
폭넓은 사회활동으로 유명하다. 관악구 문화원장으로 12년을 뛰었고, 관악구 원로회 회장·(사)동강심산기념사업회 회장·(사)심산 김창숙선생기념사업회 부회장을 맡아 동분서주하고 있다.
국민훈장 동백장·목련장을 비롯 대통령 표창·보건복지부장관 표창·내무부장관 표창·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다수의 서울시장 표창·대구광역시교육감 감사패 등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저서는 '섬김과 봉사의 삶', '꿈나무 한 그루는 숲이 되고'.
김 회장은 "기부를 하다보면 돈보다 소중한 보람과 가치가 어느 순간 나에게 와 있는 것을 느낄 것이다. 마음을 선하게 쓰면 내 몸도 건강해진다"라고 거듭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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