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사 창건이 불교 전래와 같은가?
가야에 불교가 언제 들어왔는지를 살펴보자. 불교전래에 대한 '삼국유사' 기록은 혼란스럽다. 수로왕의 왕비 허왕후가 서역(西域), 즉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기 때문에 이때 불교가 들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허왕후를 위해 세운 왕후사(王后寺)는 아래의 기사처럼 서기 452년에 창건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원군(元君:수로왕)의 8대 후손인 김질왕(金銍王)은 정사에 근면하고 또 진리를 매우 숭상했는데, 세조모(世祖母:시조모) 허황후(許皇后)를 위하고 그 명복을 빌기 위해서 원가(元嘉) 29년(452) 임진에 원군(元君)과 황후가 합혼(合婚)한 곳에 절을 세워 이름을 왕후사라고 하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근처의 평전(平田) 10결을 헤아려 삼보(三寶)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
원가(元嘉)는 중국의 남조 송(宋) 문제(文帝) 유의륭(劉義隆)의 연호로 그 29년은 서기 452년이다. 이 기사를 가야에 불교가 처음 전래하였다는 내용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기사는 누가 보더라도 왕실에서 시조모를 기리는 사철을 창건했다는 기사이지 가야에 불교가 처음 전해졌다는 기사가 아니다.
◆서역에서 가져온 파사석탑
'삼국유사'의 〈금관성 파사석탑〉조는 허왕후가 서역에서 파사석탑을 가져왔다고 말하고 있다.
"금관 호계사(虎溪寺) 파사석탑(婆裟石塔)은 옛날에 이 읍(김해)이 금관국이었을 때 시조 수로왕의 비인 허황후 황옥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48)에 서역의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아유타국에서 왔다고만 했는데 〈금관성 파사석탑〉조는 '서역의 아유타국'에서 왔다고 써서 서역, 즉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말하고 있다. '파사(婆娑)'라는 석탑의 이름도 불교와 관련이 깊다. 동양고전에서는 파사라는 말이 '시경(詩經)' 〈동문지분(東門之枌)〉에 한 번 나오는데 '춤추는 모양'이라는 뜻이다. 그 시는 "동문(東門)의 흰 느릅나무와 완구(宛丘)의 상수리나무 있는 곳, 자중씨(子仲氏)의 딸이 그 아래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는구나[東門之枌 宛丘之栩 子仲之子 婆娑其下]"라는 내용이다.
이 시는 남녀가 자신의 일을 버리고 자주 길에 모여서 노래하며 춤추고 노는 것을 풍자한 것이므로 시조모 허왕후와 관련된 내용은 아니다. '파(婆)'자는 '할머니'라는 뜻이고, '사(娑)'는 승려들이 어깨에 걸쳐 입는 승복을 뜻하는데, 파사는 고대 인도어인 범어(梵語)의 음역으로 승려를 뜻한다. 〈금관성 파사석탑〉은 허왕후가 서기 48년 서역의 아유타국에서 불탑을 싣고 왔다는 것이니 이에 따르면 불교는 왕후사가 세워지기 404년 전인 서기 48년에 전래한 것이다.
◆허황후 이전에 불교를 알았던 수로왕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불교가 처음 전래하였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 왕실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기록이지 불교 자체가 처음 전래한 기록은 아니다. 그 이전에 이 땅에 불교가 전래하였다는 기사는 그리 드물지 않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도 허왕후가 가야에 오기 전에 수로왕이 이미 불교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수로왕은 재위 2년(43) 정월, "짐이 경도(京都:서울)를 정하려고 한다"면서 임시 궁궐의 남쪽 신답평(新沓坪)으로 행차해서 사방의 산악을 바라보면서 좌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땅은 좁기가 여뀌 잎과 같지만 (경치가)수려하고 기이하여 16 나한(羅漢)이 살만한 곳이다. 또한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이루니 칠성(七聖)이 살 곳으로도 이곳이 적합하다. 이 땅에 의탁해서 강토를 개척하면 마침내 좋은 곳이 될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 부처의 열여섯 제자를 뜻한다.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이룬다'는 말은 오행설(五行說)에 따른 설명이다. 오행은 만물의 기초를 이루는 다섯 사물이 서로 순행하는 것인데, '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공자가 오행에 대해 설명한 내용이 있다.
공자의 고국인 노(魯)나라의 실권자인 계강자(季康子)가 오제(五帝)의 이름을 묻자 공자가 답했다. "하늘에는 오행이 있는데 수, 화, 목, 금, 토(水·火·木·金·土)입니다. 때를 나누어 화육(化育)해서 만물을 이루니 그 신(神)을 오제(五帝)라고 합니다." 오행은 서로 돕고 살리는 상생과 서로 부딪치고 죽이는 상극이 있다. 물에서 나무가 나오는 수생목(水生木)은 1, 3으로 상생이지만 물이 불을 끄는 1, 2 수극화(水剋火)는 상극이다.
1에서 3을 이룬다는 수로왕의 말은 물에서 나무가 나오는 상생이다. 오행의 순환에 따르면 3은 목(木)이고 7은 화(火)다. 그래서 3에서 7을 이룬다는 말도 나무에서 불이 나오는 목생화(木生火)로서 이 역시 서로 살리는 상생이다. 수로왕이 도읍으로 삼으려는 땅이 물에서 나무가 나오고, 나무에서 불이 나오는 상생의 땅이란 것이다. 이런 상생의 땅이기 때문에 부처의 제자인 16나한이 살만하고 칠성이 살만하다는 것이다.
◆불교의 칠성이 살만한 땅
칠성(七聖)이란 진리를 깨달은 일곱 성자를 일컫는다. 첫째 남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수행해서 견도(見道)에 이른 성자가 수신행(隨信行)이고, 둘째 스스로 부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해서 견도에 이른 성자가 수법행(隨法行)이다. 셋째 남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믿어서 그를 따라 수도(修道)에 이른 성자가 신해(信解)이고, 넷째 스스로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여 수도에 이른 성자가 견지(見至)이다.
다섯째 마음의 작용을 소멸시키고 몸으로 고요한 즐거움을 체득하여 수도에 이른 성자가 신증(身證)이고, 여섯째 지혜로써 무지를 소멸시켜 그 속박에서 벗어난 무학도(無學道)의 성자가 혜해탈(慧解脫)이다. 일곱째 지혜로써 무지를 소멸시키고, 또 선정(禪定)으로 탐욕을 소멸시켜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무학도의 성자가 구해탈(俱解脫)이다.
칠성을 과거 세상에 출현했던 비바시불(毘婆尸佛),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등의 일곱 부처를 뜻하는 칠불(七佛)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칠성이든 칠불이든 수로왕의 이 말은 수로왕이 허황후가 가야에 오기 전에 이미 오행과 불교에 대해서 알고 있었음을 뜻하며 가야를 불국토로 만들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음을 뜻한다.
◆해동 '끝머리'인가? 해동에는 '아직'인가?
한국사를 연구하다보면 그간 당연시 여겼던 해석에 의문을 갖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금관성 파사석탑〉조에는 "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이해서 함께 15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는 내용의 다음 구절이 海東末(해동말)인가, 海東未(해동미)인가에 따라서 불교 전래시기가 크게 달라지는 것도 그런 예다.
그간 해동미(未)로 해석해서 "그러나 이때는 해동에서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있지 않았다[然于時海東未有創寺奉法之事]"라고 해석해 왔다. 그런데 김해 여여정사의 주지이자 가야문화진흥원장인 도명 스님이 원본은 해동말(海東末)로 되어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래서 국보인 '삼국유사' '규장각본(1512년)'과 보물인 '고려대학교 소장본'을 살펴보니 모두 '해동말'로 되어 있었다. 이 경우 해석은 "그래서 이때 해동의 끝에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들었다"는 것이 되니 완전히 다르다. 목판본은 장인이 한 자 한 자 정성 드려 새기기 때문에 두 판본이 모두 오자가 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국보와 보물 삼국유사가 모두 '해동말(海東末)'로 되어 있다.
게다가 두 판본 모두 다음 문장에는 '상교미(像敎未)'라고 불교가 아직 이르지 못했다고 '未(미)'라고 판각했다. 해동미를 해동말로 판각했을 가능성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해동말로 석문(釋文)하면 해석은 다음과 같다.
"그래서 이때 해동의 끝에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들었으나 대개 상교(像敎:불교)가 아직 이르지 못해서 토인(土人)들이 믿고 복종하지 않았으므로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세계 역사상 수많은 순교(殉敎)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종교는 목숨과도 바꾸는 신앙체계다. 〈금관성 파사석탑〉조는 허왕후가 바다 건너 동쪽으로 가려다가 파도신에 막혀 되돌아갔다가 부왕의 명으로 파사석탑을 싣자 바다를 쉽게 건넜다고 말하고 있다.
비록 당시 가야인들이 전통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불교를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허왕후 일행이 이 파사석탑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렸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수로왕과 허왕후 때 가야에 불교가 들어왔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허왕후가 가져온 파사석탑이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 것이 후대인들에게 그런 사실을 증거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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