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IPEF 속 한국의 역할

입력 2023-06-07 10:45:34 수정 2023-06-07 19:21:47

박상전 경제부장
박상전 경제부장

한국이 참여한 IPEF가 출범한 지 1년 만에 첫 합의를 이뤄냈다. 이에 따라 각종 무역에서 대중(對中) 의존도를 낮추고 중국의 자원 무기화로 인한 위기 발생 시 공동 대응할 체계가 구축된다.

IPEF(Indo-Pacific Economic Framework)는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 미국 주도로 탄생한 협의체이다. '인도양-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 대중국 견제용으로 두 개의 커다란 바다를 끼고 있는 해양 세력이 뭉쳐야 한다는 취지쯤으로 해석된다.

한국으로선 IPEF가 가져다줄 산물에 정밀한 계산법이 필요하다. 견제의 핵심 내용 가운데 하나가 반도체이기 때문이다.

최근 미-중 간 벌어진 D램(컴퓨터의 주력 메모리) 사태를 보면 한국은 기회이자 위기일 수 있다. IPEF를 통해 견제 대상이 된 중국은 미국 소재 마이크론사가 생산한 D램 반도체 수입을 금지하면서 보복에 나섰다. 이 때문에 삼성과 SK하이닉스의 반사이익이 예고됐다. 지난해 기준 중국이 수입한 마이크론사 제품이 4조 원에 달해, 삼성과 SK하이닉스가 이 같은 공백을 메울 수 있어서다.

하지만 상황은 예상 밖으로 돌아갔다. 미국이 한국을 상대로 중국의 '마이크론사 공백'을 메우지 말 것을 주문했기 때문이다. 타국의 무역 활동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시장 논리를 무시한 처사이자 외교적 결례다. 그럼에도 미국은 공개적이진 않지만 우방국으로서 동맹 의지를 강조하면서 한국에 '눈치'를 주고 있다.

대륙 쪽 황금 시장이 눈에 들어오지만 미국과의 관계 때문에 한국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다. 자칫 처신을 잘못할 경우 양쪽에 미운털만 박혀, 경제 보복이 우리에게 쏠릴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이쯤 되면 한국이 왜 골치 아픈 IPEF에 가입했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정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IPEF는 교역 대상과 물품을 정하는 곳이 아닌, 세계 무역의 새로운 기준을 정하는 곳이다. 우리에게 유리한 기준을 만들기 위해서는 서둘러 논의 테이블에 자리를 만들어 놔야 한다"고 했다.

IPEF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존의 자유무역협정(FTA)처럼 관세를 철폐하거나 서비스·투자 시장을 강제하는 일은 하지 못한다. 새롭게 변하는 무역 환경에 부응하는 국제 규범을 만들어 내는 것이 더 큰 임무다.

표면적으로 FTA보다 약한 구속력을 갖고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규범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영향력은 엄청나게 커지고 다양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IPEF에서 '환경을 파괴하는 국가의 무역을 규제해야 한다'는 규제를 만들어 작동시키면 중국 등 제조업 기반의 신흥국들은 제재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환경 파괴' 기준을 세분화하거나 '환경 파괴 시기'에 대해 별도 조항을 붙인다면 일부 국가들이 빠져나갈 여력은 충분해 보인다. IPEF가 규범을 만들 때 서둘러 논의 테이블에 들어가 우리에게 불리한 독소조항을 배제하고, 유리한 문구를 생산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B형 간염 백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고도 인증 기준을 마련하지 못해 생산 주도권을 미국과 독일에 넘긴 적이 있다. 기준을 생성하는 일은 산업에서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IPEF가 지금은 참여국도 적고 구속력이 약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수출 주도국인 한국으로선 IPEF에서 어떤 논의가 이뤄지고 어떤 규범과 제재를 빚어내는지 긴장 속에 예의 주시해야 한다. 논의의 주도권을 가져온다면 더없이 반가운 일이다. 멍때리고 있다가 뒤통수를 제대로 맞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