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천초목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계절이다. 초여름 날씨가 이어지면서 길가에는 장미를 비롯한 수많은 꽃들이 예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성주군의 중심부에 위치한 대가면(大家面) 칠봉산(517m) 자락에는 성주 관내 명당 마을의 한 곳으로 손꼽히는 사도실 마을이 있고, 인근 옥화리(玉花里) 능골에는 성주 이씨(星州李氏) 중시조 이장경(李長庚)의 묘소가 있다.
옥화리의 지명은 옥녀가 화장대 앞에서 화장을 하는 형상 즉, 옥녀단장형(玉女丹粧形)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이장경의 묘소가 있는 곳이 옥녀의 단전에 해당하는 자리이고, 조안산은 화장대와 분통이다.

◆옥녀가 화장대 앞에서 화장을 하는 형상
이장경은 성주 이씨로 시조 이순유(李純由)의 12세손이다. 이순유는 신라 말 문성왕 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으며 경순왕조(敬順王朝·927~935년)에 재상(宰相)까지 올랐다. 그는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충신으로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망국의 한을 품고 충절을 지켜 고려조에서는 벼슬도 하지 않았으며 이름마저 극신(克臣)이라 고쳐 성주 땅에 은거하였다. 태조 왕건은 "나의 신하는 아니지만 나의 백성임에는 틀림없다" 하여 그를 고을의 호장으로 삼았다고 한다.
성주 호장 이장경은 이득희(李得禧)의 아들로 고려 고종 때 성주(옛 지명 경산)에서 태어나 합주군부인이씨를 맞이해 5남 1녀를 두었다. 아들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장남은 밀직사사(密直司事) 정절공(貞節公) 백년(百年), 차남은 참지정사(參知政事) 원사추봉 농서군공(隴西郡公) 천년(千年), 삼남은 문하시중(門下侍中) 숙헌공 만년(萬年), 사남은 개성유수 요산제공(樂山齊公) 억년(億年), 오남은 정당문학 문열공(文烈公) 조년(兆年)이다.

국왕은 그에게 특별히 삼중대광(三重大匡) 좌시중(左侍中),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지전리사사(知典理司事), 상호군(上護軍), 경산부원군(京山府院君)에 봉하였다. 이천년(李千年)의 둘째 아들 이승경(李承慶)은 중국 요양성 참지정사가 되어 큰 공을 세워 황제로부터 농서군(隴西郡) 선칙 봉군 하고 위 2대도 농서군에 추봉되어 한때는 농서 이씨로 부르기도 했다. 충렬왕 이후 성주목(星州牧)의 지명을 따라 성주 이씨라 하게 되었다.
◆용이 하늘로 솟구치는 모습
이렇듯 걸출한 인물이 대거 출생하는 대에는 명당 이야기가 빠질 수가 없다. 이장경의 묘소는 원래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742m) 비호석봉(非乎石峰), 즉 지금의 세종대왕자태실 자리에 있었으며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자리를 만드는 산세의 흐름을 살펴본다. 백두대간 수도산(1317m)에서 북동쪽으로 뻗어가는 수도지맥이 중간에 백마산(715m)을 기봉하고 능밭재에서 분지하여 영암산(784m)을 일으킨다. 산줄기는 다시 동남, 동으로 흘러 돌목재 가기 전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이 자리의 현무봉을 만들고 아래로 내려오다가 시계방향으로 크게 한번 회전한 후 거의 직선 형태로 내려온다.
입수처에 이르러 용이 하늘로 솟구치는 모습 즉, 비룡 입수하여 자리를 만드는데 그 모습이 일품이다. 지금은 교통이 발달되고 자동차가 있어 접근하기가 쉬워졌으나 그 옛날 말을 타거나 걸어 다니던 시절을 생각해 보면 왠만해서는 찾기도 힘든 그런 곳이다.
그 옛날 어느 도사가 이 자리를 잡아 주며 '아무리 자손들이 잘되더라도 재실을 짓지 말 것이며, 주위의 나무도 베어선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높은 벼슬길에 오른 후손들이 성묘를 할 때마다 너무 초라해 보이는 묘소에 결국 재실을 짓고 주위의 나무도 베어 시원하게 꾸미게 되었다.
그 후 세종대왕 왕자들의 태실을 마련할 장소를 물색하던 중, 그 임무를 맡았던 지관들이 이 부근을 지나갈 때 때마침 소나기가 내려 피한 곳이 그 재실이었다한다. 지관들이 이장경의 묘가 명당임을 알아보고 왕에게 보고했는데, 결국 왕명으로 묘를 옮기게 됐다고 한다.

◆인간 생명에 대한 외경과 존중심
여기에서 조선 왕실은 왜 태장(胎藏)을 중요시했는가를 알아본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남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고, 벼슬이 높으며, 병이 없을 것이요, 여자의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얼굴이 예쁘고 단정하여 남에게 흠앙(欽仰)을 받게 되는데···"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태에 대한 소중함과 더불어 풍수적 사고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태풍속은 당시 일반 백성들에게도 성행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아기의 생명선인 탯줄을 각별하게 다루었다. 이는 인간 생명에 대한 외경과 존중심을 나타내는 고유문화의 하나이다.
태실로 결정되면 왕릉 조성 때처럼 주위의 묘들을 전부 이장 할 수밖에 없기에 그때 인근에 있던 선대 묘소도 같이 이장한 것으로 유추(類推) 해 볼 수 있다. 물론 인작(人作)이 가미 되었겠지만, 이 자리는 장방형 토형(土形)의 터로 다른 태실 터와는 모습이 사뭇 다르다.
이를 감안해 보면 이장경의 부모나 조부모 또는 선대의 묘소가 왕자태실 뒤편 산록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그렇게 되면 이 자리가 일자문성[군왕사]의 본신안산이 되니 후손들의 번성과도 맞아떨어진다. 자태실에 있었던 자리 하나만으로 그렇게 번성 할 수 없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이장경 묘소는 1443년 현재의 옥화리 능골로 이장하였으며, 봉분은 부인 합천이씨와 상하로 배치되어 있다. 묘소는 임좌 병향(壬坐 丙向)의 대명당으로 종전 자리에 못지않다. 정승을 배출할 수 있는 역량을 가졌으나 점혈이 다소 아쉽다. 최근에 후손들이 중수한 오현재(梧峴齋)가 묘소 청룡방 아래에 있다.

◆형제간 우애위해 금덩이를 강물에 던져
이장경의 후손들 중에서 특기할 인물로는 문하시중을 지낸 이만년과 그의 아들로 홍건적을 물리친 이승경이 있다. 그리고 이백년의 손자 이숭인(李崇仁)의 호는 도은(陶隱)으로 정몽주, 이색 등과 함께 고려 말 충신 오은(五隱) 중의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또 이조년은 난세에 태어나 나라의 위기를 극복한 뛰어난 정치가요 시인이었다.
훗날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이조년을 고려 500년 역사 중 제1의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그의 손자 이인임(李仁任)은 고려 말 권력의 정점에 섰던 인물로 TV 역사 드라마에도 가끔씩 출현한다. 이렇듯 성주 이씨 문중은 고려 말과 조선 개국 시기에 걸쳐 많은 공신을 배출하였다.
『성주이씨가승』(星州李氏家乘)에 수록되어 있는 투금탄(投金灘)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사이좋은 두 형제가 나란히 길을 가다 금덩이 두 개를 주어, 하나씩 나누어 갖고 현재의 서울 강서구 가양동 소재 공암(孔巖)나루(양천나루)에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게 되었다. 배가 강의 한가운데에 이르자, 아우가 갑자기 자신이 갖고 있던 금덩이를 강물에 던졌다.
놀란 형이 그 이유를 묻자, 아우는 태연하게 금덩이 때문에 "우리 형제간에 우애가 손상될 것 같아 버렸다"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형 역시 자신이 갖고 있던 금덩이를 강물에 던졌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 주인공이 바로 이억년과 이조년 형제에 관한 이야기로, 후세에 형제투금(兄弟投金)이란 전설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지나치게 물질적 욕구를 추구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소중한 많은 것을 잃고 있다. 형제투금의 정신을 본받아 형제간에 우애 있고 이웃을 보살피는 따뜻한 사회가 되기를 기원한다.
노 인 영(풍수가·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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