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싸움은 사소한 이유로 시작되어 초가삼간 다 태워버릴 기세로 타오르는 경우가 많다. 각자 하는 일이 바쁜 게 완충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별 문제가 없이 보이는 부부도 싸움을 하다보면 남으로 갈라서자고 파국으로 치닫기도 한다. 특히 중년 부부는 더 위험하다.
잉꼬부부로 소문난 지인 댁에서 모임을 가졌다. 부부가 하루 종일 준비한 음식을 성대하게 대접받았다. 저녁 식사의 고급스러움에 대한 찬사를 이어가던 중, 부인이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는 말을 던졌다. < 남편이 자기 어머니와 전화할 때면, 사람이 달라져요. 기분이 좋아서 전화기를 붙들고 수다를 떨어요.> 그동안 쌓여왔던 남편에 대한 섭섭함을 털어놓았다.
어머니 전화만 오면 핸드폰을 들고 베란다로 나간다, 나가면 들어올 줄을 모른다. 남들이 보면 연애라도 하는 줄 알겠다. 나이 육십에 엄마에게 칭얼거리는 걸 보면 애가 된 것 같아요. 정신과 원장님, 이게 정상인가요? 듣고 있던 남편도 물러서지 않았다. 혼자 계신 어머니께 자주 전화 드리는 게 당연하지, 그게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 며느리가 전화 한통 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
부인은 결코 끊어질 수 없는 공동체는 부부 사이가 아니라 피를 나눈 모자 사이 밖에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남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도, 베란다를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보면 화가 가슴팍까지 차오르고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고도 했다.
한 남자를 두고 서로 가장 가까운 관계라고 주장하는 두 명의 여자가 함께 있다면, 그 아슬아슬함을 어디에 비길까. 남편은 두 여자의 서슬 퍼런 냉랭함에 눌려서 존재감을 잃어가고 감정적으로 부딪히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에 대화마저 사라진 부부의 민낯을 마주 하게 되었다.
어머니와 장시간 통화하는 중년 아들의 마음은 어떤 모습일까. 어릴 때는 학교에서 혼나고 친구들에게 손가락질 받을 때면, 가장 먼저 달려가 안겼던 어머니의 품속, 오십이 훌쩍 넘어서 다시 어머니를 찾아 유년기 아이로 돌아간 순간인걸까.
'중년기는 자신이 늙어가고 있음을 인식하면서, 삶의 무의미함과 공허감이 찾아드는 과도기'라고 하였다.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많은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서글픈 시기다. 경제적 책임은 막중한데 몸과 마음은 약해지고 자신감을 잃어가게 된다. 성호르몬이 감소되고 코티솔 등 스트레스 호르몬과 염증 수치 물질이 높아지고 기억력도 저하된다.
속마음은 불안하고 겁이 나지만, 겉으로는 강한 척하느라 심리적 피로감이 쌓여갈 때, 비난받지 않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있는가. 어린 시절 엄마가 차려준 밥상이 큰 위로의 기억으로 다가올 때, 어머니의 목소리는 큰 위로가 되지 않겠는가. 통화를 길게 하는 남편일수록 더 많이 지친지도 모른다.
이런 분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겪게 되면 그동안 견뎌온 살얼음이 꺼지듯이 우울증이 발병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 세상 어디에도 흠도 티도 없는 값진 것은 오직 어머니로부터 받은 사랑뿐이라고 고백하는 이들이 많지 않은가.
남자들이 어머니에게 정서적 의존이 고착되어 있는 것은 외로움이나 정신적 갈등을 다루는 방법을 잘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회적 참조(social referencing)라는 용어가 있다. 애매모호한 상황에서 타인의 표정을 살펴서 행동을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한두 살 된 아이가 강아지를 처음 보았을 때, 어머니가 겁을 내면, 어머니의 반응을 본 아이도 강아지에 대한 공포감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어머니가 편안하게 반응하면 아이도 개를 무서워하지 않게 된다.
사회적 참조는 문화 학습의 근간이 된다. 예를 들어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 사내는 대범해야 된다고 반복적으로 겪다보면, 부정적인 감정은 억누르고 강한 척 하게 될 것이다. 남자들의 정서적 표현이 문화적으로 억제되는 집단적 왜곡을 겪게 된다. 자기감정을 모르는 사람은 남의 감정도 살필 줄 모른다. 사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의 마음을 잘 파악하고 대처하는 사회적 교류에 있지 않은가.
남자들은 감정 표현을 해보지 못해서 가장 친밀한 관계인 부부 사이에서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 중년기는 감정 변화가 많아지면서 감성이 돌아오는 시기다. 눈물도 많아지고 내적으로 방황도 하면서 자기를 자각하게 되는 기회도 된다.
또 한가지, 남편들이 베란다로 나가는 것은 집안에 그들의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침대가 있는 안방은 아내의 방이고, 자녀들은 각자 방이 있고, 부엌은 아내의 공간이고, 거실에서 TV 켜는 것도 소파에 눕는 것도 눈치를 보게 된다. 거실도 안방도 마음이 편치 않은 남편들의 공간은 베란다뿐이다.
우리 집의 베란다는 주로 강아지들의 공간이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는데 이제 자기만을 위한 집안의 공간도 마련해서 전화도 편하게 받고 혼자 있고 싶을 때 찾아드는 아지트를 가지는 것도 좋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암이 아니라 외로움이다. 흡연만큼이나 건강에 독이 되는 감정이 외로움이다. 인생을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가족 간의 좋은 관계, 특히 부부간에 소통이 매우 중요하다. 경제적 안정이 중요하지만 일정 수준부터는 돈이 더 행복하게 해주는 요인이 되지는 못한다.
핸드폰을 들고 슬그머니 베란다로 나가기 전에, 남편의 따스한 마음을 기다리는 아내에게 다가가보자. 새로운 사람을 새로 사귀는 것보다 지금까지 내 옆을 지켜준 고마운 사람들과 깊이 있는 관계를 다져나가는 것이 건강한 삶에 더 중요하다.
글을 쓰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한밤중에 몸이 아플 때, 연락할 사람이 내겐 있는가. 내일 눈뜨면 친구들에게 안부 문자라도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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