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경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
2021년 여전히 코로나19가 위협적인 시기,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딸아이가 '인스'를 사달라고 했다. 그게 대체 뭐냐고 물어보니 인스는 '인쇄 스티커'의 줄임말이라고 했다. 기성세대답게 '아깝게 뭘 그런 데 돈을 쓰냐'고 잔소리하며 몇 장을 사줬다. 하지만 아이는 몇 장으로는 부족하다며, 아빠를 꼬드겨서는 여러 가지 인스가 들어 있는 '스티커 랜덤팩'을 주문했다. 아이는 스티커뿐 아니라 '떡메'(떡제본이 된 메모지)도 종류별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구매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스티커를 샀으니 이제 '수봉'을 만들 '랩핑지'를 사야 한다고 했다. '랩핑지'란 여러 가지 모양의 캐릭터가 그려져 있거나 무늬가 디자인되어 있는 종이 포장지를 뜻하는 말이었다. '수봉'은 바로 이 랩핑지로 직접 만든 '수제 봉지'의 줄인 말이었다. 아이는 수제 봉지에 인스와 떡메, 그리고 약간의 사탕이나 간식들을 포장 비닐에 넣어 정성껏 분류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정성껏 모아 '수봉'에 담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인스, 떡메, 랜덤팩, 수봉 등은 모두 '다꾸'(다이어리 꾸미기) 활동에 필요한 아이템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자 실내에서 혼자 즐길 수 있는 활동을 찾던 20, 30대 여성들은 다이어리를 예쁘게 꾸미는 데 열광했다. 그에 따라 꾸미기 용품 시장도 활성화됐다. 다이어리를 쓰지 않는 초등학생들 사이에서조차 다꾸 아이템이 왜 그렇게 유행하는지 궁금해서 딸아이와 아이의 친구를 대상으로 간략하게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에 참여했던 아이들은 둘 또는 세 명이서 정기적으로 스티커를 교환한다고 했다. 스티커를 정기적으로 교환하기 때문에 성의를 보이기 위해서는 유명한 작가가 그린 스티커도 한두 장씩 들어가야 했다. 그래서 아이는 더 많은 떡메와 스티커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스티커 교환은 스티커 획득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음료수를 먹으러 갔는데 돈이 없어서 친구가 대신 돈을 내줬을 때 돈으로 돌려주기는 그러니까 스티커로 성의를 표시한다. 또는 준비물을 친구에게 빌린 경우에도 고마움을 스티커로 표현한다고 했다. 친구가 숙제를 도와줄 경우에도 스티커를 준다. 스티커를 받은 아이는 상황에 맞는 적당한 수준의 스티커를 골라 상대방에게 준다. 스티커를 교환하면서 아이들은 고마운 마음을 상대방에게 표현하고 상대방에게 가지고 있던 마음의 부채도 어느 정도 해소하고 있었다.
이처럼 아이들의 세계에서 인스는 쿨라(kula) 교역망에서 쓰이는 조개 목걸이와 팔찌와 같은 역할을 했다. 쿨라 교역망은 서태평양에 위치한 트로브리안드 군도에 거주하는 섬의 원주민들이 다른 섬의 원주민들과 일상적인 재화뿐만 아니라 높은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조개 목걸이와 팔찌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쿨라 교역은 동일하거나 비슷한 가치의 재화나 서비스를 서로 교환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진행된다. 쿨라 교역망에 있는 파트너는 조개 목걸이와 팔찌를 교환함으로써 서로가 어려움에 처하면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임을 확인하고 유대 의식을 다진다.
코로나19 기간 학교 폐쇄 등으로 어린이들은 친구들과 매우 제한된 시간만 만날 수 있었고, 만나는 동안에도 늘 마스크를 껴야만 했다. 그 때문에 말과 함께 전달되어야 하는 정서적, 사회적 정보를 공유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마스크 너머 친구의 표정을 확인하기 어렵고, 서로의 유대감을 확인할 시간조차 충분치 않은 그런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자기가 가진 가장 예쁘고 귀한 것들을 교환하고, 고마움을 표현하며 그렇게 이 시간을 살아내고 있었다. 어른들에게는 외계어에 가깝게 들릴 수 있는 인스, 수봉, 랜덤팩 등은 그저 돈 아까운 줄 모르는 요즘 아이들의 이해할 수 없는 소비문화의 소산으로 치부할 게 아니라 코로나19로 인해 생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아이들 나름의 노력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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