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의 옛그림 예찬] <197> 산 속의 도서관

입력 2023-04-24 06:30:00

미술사 연구자

이광사(1705-1777),
이광사(1705-1777), '이씨산방장서도(李氏山房藏書圖)', 종이에 담채, 23.1×29㎝, 선문대학교박물관 소장

'이씨산방장서도'는 문학작품의 내용을 회화로 바꿔 그려낸 그림이다. 이 그림의 주제가 된 '이군산방기(李君山房記)'는 중국 송나라 동파 소식이 친구 이상의 부탁을 받아 지어준 글로 '고문진보'에 실려 있어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애독됐다.

소식이 붓을 들어 기록한 내용은 이렇다. 이상은 젊은 시절 여산 오로봉 아래 백석암에서 공부했는데 과거에 급제해 암자를 떠나면서 그곳에서 읽던 책을 자기 집으로 가져가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어 누구나 와서 공부할 수 있게 했다. 무려 9천여 권으로 요즘으로 보아도 상당한 장서다. 사람들이 이곳을 '이씨산방'으로 부르며 이상을 칭송했다는 이야기다.

그림을 보면 오로봉 봉우리가 솟아있고 바위들이 웅장한 울창한 숲 가운데 높은 기와집이 있다. 집 안으로 마치 상자를 쌓아놓은 것 같은 수북한 책 무더기가 보인다. 오른쪽 아래에서 한 젊은이가 이곳을 찾아온 손님을 손짓으로 안내하며 앞장서서 함께 다리를 건너 이씨산방으로 올라가는 중이다.

소식은 '이군산방기'에서 자신이 이미 늙고 병들어 세상에 소용이 없으니 이씨산방에 가서 이상의 장서를 모두 꺼내 아직 보지 못한 '미견지서(未見之書)'을 모조리 읽고 여산을 유람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했다. 그렇다면 산 속의 도서관을 찾아간 그림 속 지팡이 짚은 노인은 바로 소식이다.

'이씨산방장서도'를 그린 원교 이광사는 18세기를 대표하는 서예가다. 그림에 조예가 있어 10여 점의 작품이 전한다. 이광사는 이 그림을 그리고, '이군산방기'를 같은 크기의 화폭에 써서 하나의 주제를 그림과 글씨로 나란히 남겼다. 이광사의 자(字)를 새긴 '도보(衜甫)' 인장이 오른쪽 모서리에 있다.

명문장을 서예작품으로 쓰고, 그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이씨산방장서도'의 유래는 1606년(선조 39) 조선에 왔던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가져온 '천고최성첩(千古最盛帖)'이다. 이 첩은 20편의 고전 명문을 선정해 서예와 회화로 짝을 맞춘 서화합벽첩(書畵合璧帖)이다. 여기에 '이군산방기'가 포함돼있다. 이 첩의 복제본을 이광사의 증조부 이정영이 소장해 이 그림이 그려지게 됐다.

소식의 글은 공자와 같은 성인도 그 배움이 반드시 책을 보는 데서 시작했다고 하며 이렇게 맺는다.

석지군자(昔之君子) 견서지난(見書之難) 이금지학자(而今之學者) 유서이불독(有書而不讀) 위가석야(爲可惜也)

예전 군자는 책을 보기조차 어려웠는데, 지금 학자는 책이 있어도 읽지 않으니 안타깝다.

어제가 세계 책의 날이다.

미술사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