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꼬리와 파도

입력 2023-04-20 11:29:44 수정 2023-04-21 14:11:24

강석희 지음/ 창비교육 펴냄

더 글로리 스틸컷. 넷플릭스
더 글로리 스틸컷. 넷플릭스
강석희 지음/창비교육 펴냄
강석희 지음/창비교육 펴냄

올해 상반기 국내를 뜨겁게 달군 드라마 '더 글로리'. 폭력 가해자가 고개를 떳떳하게 들고 다니는 냉정한 이 시대의 현실이 전혀 없는, 가해자들이 파국을 맞는 속 시원한 결말에 다수의 시청자가 호응했다.

열풍에 힘입어 학교폭력 이슈는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고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 학폭 논란이 거세게 일었던 데 이어 최근 한 가지 사건이 더 터졌다.

한 TV 프로그램에 나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간 학교폭력을 당한 사실을 고백해 '더 글로리 현실판'이라고 불렸던 직장인 표예림 씨의 가해자의 신상이 세상에 공개됐다. 13일 표 씨의 동창생이라고 밝힌 한 유튜버가 가해자 4명의 신상과 근황을 폭로하며 일부는 직장에서 해고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공익을 내세운 '사적 복수'에 대해 명예훼손 우려도 나오고 있지만 '통쾌하다', '정의는 살아있다'는 등 누리꾼들의 반응은 뜨겁다.

결말이 현실적이든 비현실적이든, 더 글로리와 표예림 씨의 '복수'라는 통쾌함의 이면엔 뚜렷하게, 혹은 희미하게 보이는 어떤 한가지가 있다. '연대'다. 더 글로리 문동은이 복수를 성공할 수 있었던 건 그를 도왔던 주여정과 강현남이 있었던 덕분이었고, 표예림 씨의 가해자가 세상의 비난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표 씨의 손을 잡아준 그의 동창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상처에, 그 상처를 치료할 싸움에 함께 쉽게 손잡지 않는다. 손을 뻗는 간단한 행위면 충분한데 연대보다 동조로 비춰진다는 두려움에 차라리 타인의 고통을 '망각'하는 선택을 한다. 비겁한 행동임을 잘 알고 있지만 '나는 그 고통에 함께 묶여있지 않다'는 외면이 속 편하기 때문일테다. 그럼에도 우린 손 잡아야 한다.

"지켜 줄게. 혼자서는 못 하지만 우리가 되어, 너를 지켜 줄게."

제1회 창비교육 성장소설상 우수상을 받은 강석희 작가의 꼬리와 파도는 폭력 앞에 무력했던 청소년들이 바로 그 연대를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내용은 이렇다. 축구 선수를 꿈꾸는 중학생 '무경'은 같이 운동하던 단짝친구가 성폭력 사건을 겪으면서 피해를 알려 잘못을 바로잡으려 한다. 하지만 주변의 차가운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결국 낙담한 무경은 축구를 그만두고 다른 도시의 고등학교로 진학한다.

여기서도 무경은 친구들 사이에서 약자로 지내는 예찬과 데이트 폭력으로 상처받은 서연, 교사의 폭언에 상처받은 친구를 도우려다 실패한 현정을 만나 서로 속내를 털어넣고 위로를 주고 받는다. 이들은 연대한다. 결과는 성공. 매년 열리는 지역 유등 축제에서 피해 사실을 알리고 그동안 자행했던 교사나 친구들의 만행이 세상에 알려진다. 무경과 세 친구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이 각자 아픔을 가진 채 헤어져야 했던 옛 친구들을 만나러 떠난다.

꼬리와 파도는 고질적인 폭력을 밀도 있게 다룬다. 학교 폭력은 물론 사제 관계 간 폭력, 데이트 폭력 등이다. 이 지독한 폭력의 기억 속에 살고 있는 피해자들을 위해 강 작가가 제시하는 해법은 단 하나. 연대다. 네명의 아이들이 힘을 합쳐 세상에 소리치는 모습을 통해 강 작가는 개인의 목소리는 작지만 친구와 어른, 공동체와 연대해 내는 소리는 크게 증폭돼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폭력에 무감한 사회에서 우리는 망각한다. 가해자들은 뻔뻔한 망각을 선택하고 방조자 역시 차라리 망각하겠다 한다. 비열한 망각만이 있는 사회에서 피해자는 깊은 소용돌이의 바닥까지 내려앉아 또다시 잔인한 폭력 속에 살 뿐이다. 연대는 그들을 바닥에서 빠져나오게 할 힘이지 동조가 아니다.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피해자의 시간을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몫이어야 한다. 260쪽, 1만4천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