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 장우석(물레책방 대표) 씨의 아버지 고 장영길(시인, 전 경북여고 교사) 씨

입력 2023-04-09 14:15:41 수정 2023-04-09 18:30:56

"그토록 무거웠던 장손, 가장의 무게 이제 모두 내려놓으시고 정말 편안하게만 쉬셔요"

2022년 장영길 시인의 막내 아들 결혼식에서 촬영한 가족사진. 오른쪽 첫 번째가 장우석 대표, 왼쪽 아래 네 번째가 아버지 고 장영길 시인. 가족 제공.
2022년 장영길 시인의 막내 아들 결혼식에서 촬영한 가족사진. 오른쪽 첫 번째가 장우석 대표, 왼쪽 아래 네 번째가 아버지 고 장영길 시인. 가족 제공.

동촌 강변에 흐드러졌던 벚꽃들이 지난 비로 모두 지고 없네요. 아버지를 너무 갑작스럽게 떠나보내고 황망함에 경황이 없어 빈소를 찾아준 분들에게 여태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어요. 파티마병원 혈액종양내과를 오가며(사이사이 순환기, 호흡기내과도 오갔지요) 지난한 다발성골수종 항암제 치료를 잘 이겨내시고 재활의 의지를 다잡으시며 투병 중에 남동생의 결혼식도 치러내시고 오래 아팠던 둘째누이도 떠나보내시고 아버지로서 도리는 다 하시고 가셨어요. 정말 문인수 선생님의 어느 싯구처럼 "다 왔다" 싶으셨던가요.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에는 영상의학과와 핵의학과을 오가며 그간 항암제 치료가 잘 되었는지 검사를 받기 위해 촬영을 하셨지요. 유난히 컨디션이 좋아보이셔서 볕도 쬘 겸 일부러 병원 내 식당이 아니라 병원 근처 시장까지 나란히 걸어가 점심으로 국밥을 대접해 드렸어요. 저녁에는 어머니와 동촌 인근 식당에서 외식도 하시고 산책도 하셨다지요.

그리고 10시 정도 주무시러 방에 들어가셨고 이튿날 아침식사 준비를 하시던 어머니가 쓰러져 있던 당신을 발견하셨다지요. 혈액암 2기 진단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도 저는 며칠 동안 휘청거리며 앓았었는데 지난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잘 모르겠어요.가족 가운데 누구도 '아버지의 장례식'을 정말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터라(항암제 치료를 무사히 다 마치셨으니까요) 다들 장례 기간 내내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어요.

어찌어찌 연락이 닿거나 소식을 전해 듣고 한걸음에 달려오신 아버지 지인들은 하나같이 당신의 근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계셨지요. 당신 스스로 투병 소식을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았고 무엇보다 완쾌할 수 있다는 믿음이 크셨잖아요.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치료 이외에도 나름의 운동도 꾸준히 이어오고 계셨고요. 그만큼 당신은 자존심이 강하셨던 분이셨지요.

아버지는 경북 예천의 가난한 집안에 6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나셨어요.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명석한 두뇌로 고향에서 중학교까지 마치고 대구로 올라와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재학 당시 2·28 민주운동에 직접 참여를 하셨고(아버지는 '2·28 민주운동 유공자'로, 당시 전교조의 모태가 된 한국교원노조 활동을 하신 故 이목 선생님의 제자이셨습니다)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가셨죠.

그리고 7학기 만에 학위를 마치시곤 곧장 교편을 잡으셨어요. 성주고등학교를 시작으로 경북여자고등학교에서 퇴직하실 때까지 평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셨고요. 그 사이 시지고등학교 교가의 노랫말도 지으셨고요.

대학 시절 경북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故 김춘수 시인('꽃'의 시인, 맞습니다)의 제자로('안도현 시인의 스승' 도광의 시인의 후배이자 '신부시인' 이정우 시인의 선배쯤 되실 겁니다) 2004년 뒤늦게 정식으로 등단을 하시고 첫 시집 모지(母誌)를 서울 소재 출판사에서 펴내시기도 하셨잖아요(첫 시집을 쓰다듬으시며 기뻐하시던 표정 잊을 수 없습니다). 교편을 놓으시곤 줄곧 시작(詩作)에 전념하셨고요.

어렵게 낳은 장남임에도 당신의 기대와는 다르게 졸업하곤 영화를 찍네, 누구 선거운동을 돕네, 선배가 일하는 시민단체 일을 거드네 하며 참 많이도 돌아다녔지요. 그럼에도 무한한 사랑을 주셨고 또한 끈질기게 지켜봐주셨어요. 아버지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아마 없었을 거예요.

아버지의 유고 시집이 될 두 번째 시집과 아버지의 시작을 총망라할 전집 작업도 아버지의 선·후배, 동료 작가 선생님들과 찬찬히, 정성껏 잘 만들어 보려고 해요. 그러니 그토록 무거웠던 장손의 무게, 가장의 무게 이제 모두 내려놓으시고 정말 편안하게, 편안하게만 쉬셔요. 떠올리면 잘해드렸던 일보다 그렇지 못한 일들이 더 많았어요. 언제나 늦은 용서를 빕니다.

세상이라는 거센 장맛비 속에서 늘 기꺼이 우산이 되어주셨던 아버지, 언젠가 아버지를 웃으며 떠올릴 수 있는 날이 오겠지요. 그때까지만 조금 더 울게요. 너무 나무라진 마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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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매일신문이 함께 나눕니다. '그립습니다'에 유명을 달리하신 가족, 친구, 직장 동료, 그 밖의 친한 사람들과 있었던 추억들과 그리움, 슬픔을 함께 나누실 분들은 아래를 참고해 전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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