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한일 관계가 윤석열 대통령의 통 큰 결단으로도 관계 개선이 안 되고 있다. 미중 관계가 세계 경제 사이에 패권 다툼으로 최악의 살얼음판을 형성하고 있고 북한은 연일 핵무기를 만지작거리며 한반도를 긴장시키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으로 세계 경제는 막대한 지출 비용을 치르고 있고 한중 관계도 어색한 사이가 돼 버렸다. 한국은 정치 지형학적으로 미국을 사이에 두고 일본과 유연한 파트너십이 필요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정부 입장대로 통 큰 결단을 내렸다. 일본 강제 동원 피해에 전범 기업이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지 4년 4개월 만에 한국 기업 '3자 배상안'을 발표했다. 정부 발표 10일 만에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변제안과 구상권 문제, 지소미아(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정상화 등 굵직한 선물 보따리를 대통령의 말로 풀어놨다. 야당은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에 대한 일본의 과거사 사과 한마디 못 듣고 돌아온 정부를 향해 '빈 보따리' '굴욕 외교'라며 비판의 칼날을 높였다.
한일 정상회담 후 민심의 반응은 싸늘했고 야당에는 전운(戰雲)이 감돌아 보였다. 징용 문제 해법과 한일 정상회담 결과가 정부의 최대 근로시간 개편안과 묶여 대통령 지지율은 30% 중반으로 내려앉았고 부정 평가는 60%대로 상승했다.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국무회의를 생방송으로 내보내면서 대국민 설득에 나섰다. 여당의 한 국회의원은 "미래적인 국익을 위해서라도 대통령의 통 큰 결단으로 한일 관계가 달라질 것으로 본다"는 긍정 신호를 보냈다. 일주일 뒤 일본은 반격에 나섰다. 초등 국정교과서(3~6학년) 사회 과목 12종을 일본 문부과학성이 검정 승인하면서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징병'됐다는 표현은 '지원'으로,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 재일 조선인 학살 사건은 삭제되고 '독도'를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는 일본 고유 영토라는 역사 왜곡 교과서를 발표했다. 대통령 선물 보따리를 우익 역사 교과서로 반격하며 민심에 얼음물을 부었고, 강창일 전 주일 대사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일본 우익 세력들을 살피며 한일 관계 개선에 속도를 낼 필요가 있었다"며 "일본은 때렸더니 그냥 말 잘 듣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분석한 것이다. 때렸다는 말은 한국 대법원의 강제 노역 피해자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의 보복 조치로 2019년 7월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인 불화수소 등 3개 품목의 한국 수출을 규제하고 8월에는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한 것을 둘러 표현한 말이다.
정치적으로 공식적인 사과는 오부치 선언을 운운하며 침묵한다 하더라도 진심은 태도에서 나타난다. 한국 사회 민심은 일본과 완전한 치유가 불가능하다. 역사가 말해 주고 있다. 일본 우익들은 독도 영유권과 전범 기업의 배상 문제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유지해 왔고 태평양전쟁 전범과 일본 보수 우익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요시다 쇼인'의 위패가 봉안된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이어 오고 있다. 기시다 총리의 일본 자민당은 이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통 큰 선물을 들고 온 윤 대통령과 회담 후에 양국의 미래적인 개선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민감한 역사 교사서 문제를 속도 조절하며 들고나왔어야 했다. 타이밍 반격이 절묘했고 국민은 선물을 주고도 뒤통수를 맞는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대통령의 시간은 흐르고 있는데도 경제는 안갯속이고 은행은 이자로 성과급 잔치를 벌이며 안보와 외교는 해법이 보이질 않고 있다. 대통령 말대로 '미래'는 민심이 기다릴 수 있도록 정치로 보여지는 것이다. 국민은 '통 큰' 선물보다는 '통 큰'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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