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선경제신문 제주 4‧3 취재기
'배는 중도 운무에 포위되어 해상에서 2박 예정보다 2일간 늦게 15일 오전 9시 목적지 제주항에 도착한 이날 일행의 상륙에 앞서 제주도를 떠나는 무장 육상경비대를 만재한(가득 태운) 해안경비대함의 출항 풍경은 완연 붉은 피 흐르는 전지에 온감을 충분케한 바 있다. 일행은 도보로 읍내로 향하는 도중 요소요소에는 무장경찰관과 전투 태세를 갖춘 육상경비대가 서 있음에 한층 더 긴장감을 느끼게 하였다.' (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7월 22일 자)
제주 4‧3은 동족상잔의 동란으로 당시 신문에 보도되었다. 같은 동족끼리 싸워 피를 흘리고 있어 동란으로 표현했다. 그 뒤 일어난 6‧25전쟁을 상징하는 동족상잔이란 표현을 미리 썼다. 제주 4‧3의 잔혹함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제주서 발생한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전국적인 이슈로 바뀌었다. 남선경제신문 등 대구의 신문들도 제주도 현지 취재에 나섰다. 대구 법조계 기자 9명은 기상악화로 배를 타고 이틀이나 걸려 제주에 도착했다.
기자단 일행은 걸어서 제주 읍내로 향했다. 기자단을 첫 번째로 맞은 것은 거리마다 나열한 무장 경찰관과 전투 태세를 갖춘 육상경비대였다. 살벌한 도로를 지나 도착한 창고에는 군경과 맞선 산사람들로부터 압수한 무기들이 쌓여 있었다. 일제 장총과 권총, 공기총, 죽창이었다. 천막으로 지어진 포로수용소에는 18~19세의 청소년과 60세에 이르는 장년층도 있었다. 군인들은 이들을 산속에서 체포했다지만 수용자들은 농사를 짓다가 끌려왔다고 항변했다.
'동란의 과는 결코 이 섬의 평화만을 깨트리고 씻어가지는 않았다. ~민정의 불안으로 학교란 학교는 거의 다 폐문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기자단 일행이 방문한 곳 북촌국민학교의 탐스런 돌담은 어느덧 모진 비바람에 허물어져 가고 교실에는 허물어진 책상, 걸상이 어린 주인공을 잃은 채 있다. 교정에는 잡초만 무심히 무성하고 군데군데 피어가는 코스모스가 임자 없는 교정을 홀로 지키고 있다.~' (남선경제신문 1948년 7월 20일 자)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기슭은 불꽃으로 물들었다. 오름마다 붉게 타오르는 봉화 때문이었다. 오름은 산을 가리킨다. 봉화의 불꽃은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무장봉기를 알리는 신호였다. 무장대는 곧바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인 서북청년회(서청) 단원 등의 집을 습격했다. 총파업 이후 제주도로 들어온 극우 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 단원들은 빨갱이 사냥을 한다며 테러를 일삼았다. 증오와 원한의 충돌이었다.
대구 기자들이 찾은 제주의 곳곳은 참상의 흔적이 그대로였다. 학교에 아이들은 간데없고 운동장에는 잡초만 무성했다. 제주도는 일찍이 균등한 교육환경을 조성하려고 애쓰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다. 동네 한곳에 초등학교와 하나의 면에 중학교가 한 개씩 있었다. 그런 만큼 교육 현장은 4‧3의 참혹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교원과 아동들은 공포에 휩싸여 학교 수업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학교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산중마을인 저지리는 마을 전체가 불에 타 폐허로 변해 있었다. 살아남은 목마만 어슬렁거렸다.
제주 4‧3 사건의 비극은 이미 한해 전에 잉태하고 있었다. 1947년 제주읍 북국민학교서는 3‧1절 기념행사가 끝났고 군중들의 가두시위가 있었다. 시위 와중에 어린이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치여 다치는 사고가 났다. 기마경찰은 아이를 그대로 방치했고 흥분한 군중은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무장경찰은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았다.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희생되었다. 경찰에 대한 반감은 일제 순사의 악몽마저 겹쳐 민심을 들끓게 했다.
'18일 정오 북촌서의 조사를 마치고 조천면 함덕동에 도착하자 동동리 입구 노상에서 한 노파가 울고 있었다. 그 노파 말에 의하면 자기 아들이 5월 29일 경찰에 체포된 후 행방불명이 되어 경찰에 호소하였으나 안심하라는 말뿐 아들 찾아서 8일간이나 다니다가 중문면 모산중에서 사체를 발견하였다고 하였다.~' (남선경제신문 1948년 7월 29일 자)
미군정은 5‧10선거의 무효를 빌미로 강경 토벌 작전을 벌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도 토벌 작전은 지속됐다. 군경토벌대는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살생했다. 이에 맞서 무장대들은 경찰 가족과 우익인사를 공격했다. 무엇보다 국가공권력에 의한 집단 희생이 컸다.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7년여에 걸쳐 2만 5000~3만 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죽어서도 가족 품에 돌아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 적잖았다.
이에 앞서 대구의 기자들이 제주도로 떠나기 전 대구에 사는 제주도 출신 모임인 제우회는 평화적인 해결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냈다. 애초부터 4‧3의 참혹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주 4‧3은 비극을 치유하는 상생 과정이 진행 중이다. 그 출발은 시민의 관심과 진상규명이었다. 대구의 10월항쟁 같은 아픔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박창원 계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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