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IN] 심판계 '레전드' 김동진 심판위원장 "한국서 월드컵 심판 키울 것"

입력 2023-03-29 11:30:13 수정 2023-03-29 20:03:43

국내 프로축구 심판 시스템 변화 주도…사전 배정제·수시 강등 등
"한국인 월드컵 심판 배출이 꿈…참가국 대폭 늘어나는 북중미 월드컵이 찬스"

지난해 K리그1 울산현대와 강원FC의 경기에서 주심으로 투입된 김동진 심판위원장의 모습.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지난해 K리그1 울산현대와 강원FC의 경기에서 주심으로 투입된 김동진 심판위원장의 모습.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심판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직업이다. 올바른 판정을 내리더라도 그에 따른 유불리 때문에 양 팀 팬들에게 지탄받기 일쑤다. 100번의 판정 중 단 한 번이라도 오심을 저지른다면 온갖 야유와 비난을 감내해야 한다. 그래서 심판이라는 직업 앞에 '칭찬받는'이란 수식어가 붙는 건 왠지 낯설다.

어딜 가도 좋은 소리는 듣기 어려울진데, '칭찬받는 심판'을 만드는 게 목표라는 사람이 있다. 바로 대한축구협회의 김동진 심판위원장이다. 대구 출신 첫 심판위원장을 맡게 된 그는 "축구 경기를 영화 제작에 빗대면 심판은 엑스트라와 비슷한 역할을 해야 한다"며 입을 뗐다.

김 위원장은 "영화가 잘 만들어지려면 주연과 조연, 그리고 엑스트라가 잘 조화를 이뤄야 한다. 주연이 아닌 엑스트라가 비중을 차지한다면 관객들은 황당해할 것"이라며 "축구 경기에선 관중이 첫 번째고 선수가 두 번째, 우린 마지막이다. 그러니까 경기가 끝난 뒤 가타부타가 없다면 그 심판은 칭찬받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올해 초 심판위원장으로 임명된 그는 1997년부터 지난해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며 국내 최고의 심판으로 불리던 인물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무대까지 누비며 쌓은 경력도 화려하다. K리그만 247경기에 나섰고, 아시안컵, 17세 이하(U-17), 20세 이하(U-20) 월드컵을 비롯한 수많은 국제 대회를 경험했다.

김동진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장. 신중언 기자
김동진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장. 신중언 기자

김 심판위원장은 지난 3개월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고 회상했다. 평일에는 심판 배정 관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대구에서 서울까지를 오가야 하고, 주말이면 K리그 경기를 참관한다. 심판들의 경기력이 어떤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다. 지난 4일에는 DGB대구은행파크에서 열린 대구 홈 개막전을 관전하기도 했다.

그는 "아직 현역 티를 다 못 벗은 것 같다. 대구 경기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발가락에 힘이 들어가더라"며 "그래도 이제는 내 역할이 달라졌다. 그동안 심판으로 일하면서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20여 년간 농축한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 심판의 역량 강화와 여건 개선을 위한 혁신을 추진하는 중이다. 심판위원장이 아마추어부터 프로리그에 이르기까지의 심판 업무 전반을 관장하는 역할인 만큼, 국내 심판 시스템 전체에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꼽히는 변화는 ▷사전 배정제 ▷심판 수시 강등 ▷심판 체력 테스트 기준 완화 등이다.

사전 배정제는 전산 시스템의 알고리즘을 통해 심판들에게 한 달치 '일감'을 한 번에 주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라운드마다 배정되던 것을 대폭 늘렸다. 이는 심판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조치다.

"심판도 스트레스를 덜 받아야 판정을 잘 내립니다. 매 라운드마다 경기가 배정되면 심판들은 항상 긴장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어요. 내가 언제 어느 경기에 들어갈지 모르니까요. 주말 계획을 세우기도 어렵고요. 그런데 이 사전 배정제를 도입하면 이런 문제가 대폭 해결됩니다. 다만 외부에 배정 정보 누설 가능성이 커진다는 단점도 있죠. 그래서 해당 경기에 투입되는 주심, 부심, 대기심 등 심판 6명 이외에 정보가 누설된다면 '원 스트라이크 아웃'으로 징계할 생각입니다."

김 위원장이 주도한 변화에는 당근만 있는 게 아니다. 심판 수시 강등이 원칙이 그 대표적인 예다. 오심을 저지르거나 징계를 받은 심판은 당장 그다음 경기부터 하부 리그로 강등시킨다는 얘기다.

그가 다소 냉정해 보이기까지 한 결단을 내린 이유는 하나다. 바로 국내 심판계의 역량을 한층 끌어올리고 나아가 한국인 심판이 세계에서 활약할 발판을 만들기 위함이다.

국내 심판이 월드컵 무대를 밟아본 적도 어느덧 까마득해졌다.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 부심으로 활약한 정해상 심판이 마지막이다. 주심으로 활동한 사례는 2002 FIFA 한일 월드컵 당시 김영주 심판 이후로 20년 동안 끊겼다.

김 위원장은 "한국인 심판이 뛰는 월드컵 경기를 보는 게 내 꿈이다. 이를 위해선 외교적 노력도 뒷받침돼야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기량"이라며 "신체적 조건부터 언어 능력. 경기력까지 모두 세계 최고 수준이어야 한다. 이를 끌어올리려면 상과 벌이 확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참가국이 48개국으로 늘어나는 2026 북중미 월드컵이 최고의 찬스라고 생각한다. 경기 수가 많아지는 만큼 필요한 심판 수로 배 가까이 늘어난다"며 "그때를 바라보고 대한축구협회 심판운영팀과 함께 차근차근 시작하려 한다. 수십년간 축적한 경험을 고스란히 녹여내 미래를 준비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