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 수필가(미니픽션작가)
안개 범벅에 사방이 희다. 낙동강이 휘감은 사문의 마을에 닿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십여 분을 걷는다. 이쯤에 돌돔과 광어가 유영하는 수족관이 있는 자리. 저쯤에 치킨 가게와 열쇠가게, 여기 목련과 산수유나무가 있는 자리. 가늠한다는 거. 모름지기 이곳 원주민만의 오랜 관찰과 사유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어디든 사람 들어 묵고 있을 아파트 불빛들. 먼 바다로 나간 오징어잡이 배의 집어등으로 너울거린다. 얼금얼금한 불빛을 등지고 걸어오는 한 무더기의 발걸음. 식당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종소리. 사물의 형체는 묻고서 걸음과 종소리가 먼저 도착하는 저녁. 칼날이란 날은 죄다 뭉텅뭉텅 잘라먹고 이도 저도 아닌 흐물거림만 둥둥 떠다니는 섬들 지천이다.
문득 가슴이 저미어 오는 건 왜일까. 궁색한 변명 같지만 봄이 오는 동안 난 갓 튀겨낸 튀밥이었다. 잠시겠지만 오늘 밤이 주는 고요함에 깃들고 싶은 욕망이 인다. 후문 근처 벤치에 축축한 물기를 닦고 앉았다. 흙내음 훅 끼친다. 눈이 뚫어지게 보아도 강 건너 비슬산 자락은 온데간데 없다. 휴대폰 불빛을 켜니 영상 13도다. 그제야 옆 벤치 노인이 눈에 들었다. 혹여 저 속인의 노인마저 잠시 인간세계를 다녀가는 선령은 아닐까 하는. 하긴 이 능청스러운 생각을 맑은 날에 하겠는가.
느닷없이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는 중 화면에 갑자기 비슷한 연령대가 많이 찾은 쇼핑 목록이 떴다.
'매스틱/해남고구마/글루타치온/스프링 아우터/지압슬리퍼/오차드토이즈/알타핏리커버리슬리퍼/차량용방향제/z플립4 케이스/홍게/냉이'
아는 거라고는 서너 가지뿐. 낯선 이름들은 도대체 어디에다 사용하는 물건인지. 충격에 검색해 볼 기운조차 없었다. 세상을 등진 은둔자도 아니건만. 글로벌한 쇼핑문화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 죄일까. 비슷한 연령대에서 한참을 밀려나 변방의 아웃사이더가 되어 버린 지금. 그 생각을 하자 다시 혼란스럽다.
지척에 앉은 노인이 일어섰다. 자박자박 신발 끄는 소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가만가만 안개 냄새가 났다. 이내 걷잡을 수 없이 여기저기서. 내년으로 다가온 총선에 너나 할 것 없이 물밑작업에 여념 없다. 판세는 어떻게 돌아갈지. 여야 강경대치 속에 할 일은 산재해 있건만 진척 없기는 마찬가지. 얼키설키 뒤얽힌 국제정세는 어떻고. 전략을 뒤춤에 감춘 채 한사코 두 얼굴로 들이밀고 있으니. 정치에 부박한 무속인이 등장한다는 둥, 질적 성장을 위한 정책 방향도, 포용과 다양성을 담은 건강한 정치는 어디에 묻혔는지. 이래저래 죄다 동굴뿐이라고 일컫는 것은 나의 기우의 소산들인 거지 뭐.
삼경을 지난다. 안개에 발목을 적신 밤새가 강변으로 후둑후둑 날아올랐다. 고층 아파트에서 들려오는 애완견 짖는 소리. 산 아랫마을에서 천겁의 물방울을 가로질러 오는 닭 울음. 나는 더듬이를 만들어 벌초하듯 길을 내며 집으로 돌아간다.
'가을 안개는 천석을 올리고 봄 안개는 천석을 내린다'는데 지금까지 길이 보이지 않는 안개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는 밤. 어쩌자고 이 보리곰팡내를 풀풀 풍기며 봄밤에 덮쳐왔는지 말 좀 해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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