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
이번 주 정치권의 가장 큰 화두는 역시 한일 정상회담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2018년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의 대법원 판결 이후 꽉 막힌 한일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을 설립해 변제하는 제3자 변제 방식을 제안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언젠가 해야 하고, 누군가 해야 한다면, 지금 내가 하겠다"면서 이번 결정이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를 위한 필연적 과제임을 분명히 했다. 윤 대통령의 대승적 결단에 따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이 전격적으로 실현되었고, 마침내 1박 2일의 도쿄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당사자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즉각 반발했다. 일부 피해자 유가족은 이쯤에서 한일 관계의 정상화가 필요하다며 정부의 조정안을 수용하기도 했지만 약 15명의 피해자는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과와 일본 전범 기업의 직접 배상이 아니면 절대 받을 수 없다는 강경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정치권은 예상대로 양분됐다. 국민의힘은 "미래지향적 새 시대를 연 회담"이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더불어민주당은 "굴욕적 야합이며, 일본 자위대가 다시 한반도에 진주하지 않을까 두렵다"면서 친일 프레임을 고수했다.
피해자들은 한마디로 '선악'의 시각에서 이 사안을 보고 있다. 피해자들에 공감하는 시민사회단체나 일반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선악의 시각에서 보면 본인의 의사에 반해 강제징용에 끌고 갔고 그 임금을 제대로 주지도 않았으니 아무리 국가 간 조약을 통해 문제를 일단락 지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기본적 인권의 문제이며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악은 받드시 징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제법상의 각종 해석이나 시효 등 법적 문제들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인권의 문제에는 어떤 제한도 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피해자들의 주장처럼 인권은 인류 사회의 보편적 가치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두 가지 문제가 남는다. 하나는 피해자들은 기본적 인권의 문제로 보는데, 가해자들은 민사상의 계약의 문제로 보고 있으며, 그것도 한일의정서를 비롯한 국제법상의 한일 양국 간의 조약에 의해 이미 해결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즉 문제의 내용과 특성을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일본 기업의 한국 내 재산을 압류해 처분한다면 일본 내 한국 기업에 동일한 보복이 행해질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고, 현실적으로 한일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을 것이 분명하다.
둘째, 피해자들은 이 사안을 선악의 시각에서 바라보는데, '선악'의 가치판단은 국제관계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국제기구나 각종 국제법도 사실은 강대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한 그 존재와 영향력을 인정받는다. 우리 대법원이 강제징용에 대한 일본 기업의 직접 배상 판결을 내린 이후 일본은 우리 반도체 기업에 대해 3대 소재의 수출을 금지했고, 우리나라를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시킴으로써 양자 간 무역 관계에 큰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론 우리도 WTO에 일본을 제소했지만 이를 통한 해결은 요원하다. 더 중요한 것은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도발이 크게 증가하는 상황에서 양국이 서로 군사 정보를 공유하는 GSOMIA를 중단시킴으로써 안보상의 불이익이 크게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국가안보의 불이익은 경제적 이익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단 한 번의 정보 공유 실패가 국가의 생존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대법원의 배상 판결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당시 맺은 한일의정서와 김대중-오부치 선언 이후 50여 차례 반복된 일본의 사과, 그리고 사법 자제의 원칙 등 국제법과 한일 관계의 역사를 반추해 볼 때, 합리적 판결이라고 보기 어렵다. 일본의 경제 보복이나 독도에 관한 주장, 역사 왜곡 교과서 등도 합리적이 아니라는 것은 마찬가지다. 미중 간 패권 경쟁이 가속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미국의 동아시아 동맹국인 한일 간의 갈등은 결코 오래 계속될 수 없고 계속되어도 안 된다. 결국 이 시점에 우리에게 놓인 선택지는 선악의 관점에서 파탄 난 한일 관계를 계속 내버려 두느냐, 아니면 국익 극대화의 관점에서 한일 관계를 조기에 정상화하느냐였다. 정치권에서 국민의힘과 윤석열 정부는 후자를,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은 전자를 선택한 것이다. 어느 쪽이 올바른 판단인가는 후세 역사가 입증할 것이다. 역사를 두려워할 줄 아는 정치인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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