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IN] 축구명문 대륜고·청구고 자존심을 건 ‘20년 축구 전쟁사’

입력 2023-03-15 11:23:46 수정 2023-03-15 18:47:10

대륜FC vs 청구15FC 19년째 라이벌전
"어느 학교가 축구 더 잘할까" 술자리 궁금증에 시작돼 조인식 열고 정식 경기
첫 맞대결, 대륜이 8대1 승…청구고 "선수 출신 4명 들어가" 지금도 인정 못 해
20년 가까이 치고받다 보니 어느새 사적 모임까지 공유
"일흔이 넘어도 함께 차고파"

대구 달성군 가창체육공원에서
대구 달성군 가창체육공원에서 '대륜FC'와 '청구15FC'의 축구 경기가 진행되는 모습. 신중언 기자

대부분의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축구는 특히 남자의 승부욕을 자극한다. 자칭 축구인이라면 다른 말보다 '축구 못 한다'는 한마디에 울컥한 기억이 하나쯤은 있을 터다.

남자들의 '축구 자존심'은 학창 시절 더욱 뜨겁게 타오른다. 우리 반 축구 실력이 최고여야 하고, 우리 학교가 지역 제일이어야 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무더운 여름날 비지땀을 쏟아내면서도 기꺼이 뛰어다닌다. 짧은 점심시간까지 쪼개 반 대항전을 치르기는 여사다.

대구에는 '축구 자존심'이 빠지면 섭섭한 두 학교가 있다. 바로 대륜고와 청구고다. 지역의 축구명문으로 잘 알려진 두 학교 축구부는 수십년 째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재학생은 물론 졸업생들에게도 이들 축구부는 자부심이자 자랑거리다.

대륜고와 청구고 축구부의 맞대결은 언제나 지역사회의 관심을 받는다. 그러나 학교 운동장 밖에서 두 학교 졸업생들의 축구 대결이 19년째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는 건 그리 알려진 사실이 아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대륜고 30기와 청구고 15기 졸업생들이 주축이 된 '대륜FC'와 '청구15FC'. 60세가 훌쩍 넘어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회원들은 주말마다 운동장에 모여 두 학교의 명예와 자존심을 건 승부를 벌이고 있다.

대륜고 30기와 청구고 15기 졸업생들이 주축이 된
대륜고 30기와 청구고 15기 졸업생들이 주축이 된 '대륜FC'와 '청구15FC' 회원들이 기념사진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중언 기자

◆축구로 통하는 두 학교

지난 5일(일요일) 오후 대구 달성군의 가창체육공원. 축구장에 중장년의 남성들이 어슬렁어슬렁 모인다. 농담을 주고받으며 가볍게 몸을 푼 이들은 유니폼을 갖춰 입고 그라운드에 선다. 대륜고가 파란색, 청구고가 빨간색 유니폼이다.

경기는 25분씩 4쿼터로 진행됐다. 그라운드 위를 쉴새 없이 뛰어다니는 이들은 웃음기가 가득했다. 때로는 진지한 표정으로 경기에 몰입하기도 했다. 학창시절에나 지었을 법한 표정이 얼핏 보였다. 그러나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찬 외침이 들린다. "나 교체 좀 해줘!"

처음엔 그저 호승심 때문이었다. 2004년 여름, 대륜고 30기와 청구고 15기가 우연히 모인 술자리에서 나온 얘기가 발단이었다. "누가 축구를 더 잘할까?"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질문. 두 학교 졸업생들은 즉시 자웅을 겨루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격식을 갖추고 경기에 임했어요. 동기 중에 변호사 하는 친구까지 불러 조인식(調印式)까지 진행할 정도였으니까요. 첫 맞대결은 고산정수장 잔디구장에서 열렸는데, 대륜이 8대 1로 이겼어요. 근데 나는 그 결과를 아직도 인정 못 합니다. 그때 대륜에는 선수 출신이 4명이나 나왔거든요."

2004년 8월, 대륜고 30기와 청구고 15기 졸업생들이 축구 친선전을 위한 조인식(調印式)을 진행하는 모습. 청구15FC 제공
2004년 8월, 대륜고 30기와 청구고 15기 졸업생들이 축구 친선전을 위한 조인식(調印式)을 진행하는 모습. 청구15FC 제공

청구고 15기 류병준 씨는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두 학교의 명예가 걸린 건곤일척의 한판. 승리는 대륜고에 돌아갔다. 그러나 납득할 수 없었던 청구고는 선출을 빼고 재대결을 하자고 제안했다. 대륜FC와 청구15FC의 대결은 이때부터 꾸준히 이어졌다.

◆축구공 하나로 '라이벌에서 친구로'

비록 첫 만남은 승부욕에서 비롯됐지만, 이제는 서로의 경조사를 챙기고 송년 모임까지 함께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공 하나를 놓고 격렬하게 치고받다 보면 그리운 그 시절 교정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다.

대륜고 30기 이수종 씨는 "여러 운동을 다 해봤지만, 축구만한 운동이 없는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봐왔던 친구들과 함께 합을 맞추고 있다는 게 참 즐겁다"며 "이 모임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생각도 못 했다. 70살이 넘어도 지금 이 친구들과 건강하게 공을 차는 게 내 소망"이라고 했다.

두 학교 졸업생들의 축구 경기는 시간이 더 흘러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여러 사정으로 필드를 떠난 선배들의 빈자리를 후배들이 채우고 있는 덕분이다.

청구고 15기 김보현 씨는 "앞으로 다른 후배들도 우리 모임에 많이 찾아와주었으면 한다. 축구 실력은 중요하지 않고 인성과 열정만 있으면 된다. 각계각층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만, 축구공 하나로 잘 어울려 논다"며 "다른 장점을 꼽으라면 후배에게 물심부름은 절대 안 시킨다는 것 정도가 있을 것"이라며 웃었다.

대륜FC 회장을 맡고 있는 김동환 씨는 "이렇게 친구들과 함께 놀면 그 시절 교정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며 "원래는 대륜고 운동장에서 공을 찼는데 코로나19 이후 계속 개방되지 않고 있다. 다시 모교의 운동장에서 축구를 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