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규 계명대 교수
「대성당」은 미국 단편 문학의 백미로 평가받는다. 소박하고 고아한 문체가 겨울 나뭇가지 같다. 물론 1981년에 나온 소설이 문체만으로 상찬받을 순 없다. 문체 실험은 오래 전에 끝났다. 이 단편의 묘미는 담담한 언어표층을 흔드는 내면의 울림이다. 손가락 끝에서 가슴으로 차오르는 울림이다.
'손가락'이라 했거니와 「대성당」은 바로 촉감의 미학을 말한다. 주인공이 맹인이라면 알만할 것이다. 그렇다, 화자 '나'는 맹인 로버트와의 특별하고 아름다운 만남을 전한다. '나'가 TV나 영화에서나 보던 맹인과 하루를 보내게 된 것은 아내 때문이다. 아내가 예전에 낭독 봉사를 하며 알게 된 로버트를 집에 초대한 것이다. 맹인이라면 '검은 안경에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걷는' 차원 다른 존재로 생각하던 '나'로서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걱정이다.
아내를 따라 집으로 들어오는 로버트를 보는 순간 맹인에 대한 편견에 금이 간다. '맹인이 수염을 다 기르고....'라며 놀라는데 그의 셔츠·바지·신발이 갈색으로 깔 맞춤된 첨단 패션이다. 편견에 균열이 계속된다. 로버트는 '나'를 '젊은 양반'이라고 하며 거부하기 힘든 친화력을 발산한다. 술과 담배도 사양하지 않고 민감한 질문에도 주저 없이 답한다. 모든 토픽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아마추어 무선으로 전 세계의 사람들과 사귀고 있다는 말에 이웃과도 왕래가 없는 '나'로서는 두 손 들지 않을 수 없다.
밤이 이슥해지자 '나'는 습관처럼 TV를 트는데 대성당이 나온다. 대성당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로버트가 묻자 '나'는 당황한다. 언어역량을 총동원해 설명해 보지만 중구난방이다. 그러자 로버트는 괜찮다며 큰 종이와 볼펜을 가져오라고 한다. 성당을 그려 보라는 것이다. 자기의 손을 '나'의 손 위에 포개놓은 채.
"멋지군. 아주 잘 그리고 있어. 산다는 건 신비로운 거지. 그렇지, 계속 그려." '나'는 마법에 걸린 듯 성당을 그리고 로버트는 신나게 추임새를 넣는다. 성당을 다 그리자 사람도 있어야 한다며 사람을 그리라고 한다. 대신 사람은 눈을 감고 그리라고 한다. '나'가 눈을 감고 사람을 그려 넣자 로버트는 눈을 뜨고 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눈을 뜨지 못한다. 대신 속으로 중얼거린다. '난 분명히 집 안에 있었어. 그런데 무엇 안에 있다는 느낌이 없어. 엄청난 일이야.' 이렇게 '나'는 손등이 잡힌 채 놀라운 해방감을 느낀다. 해방은 미의 핵심적인 효능이다.
전통적으로 촉각은 미학적 범주에 들지 못했다. 순전히 물질성의 감각이라고 여겨 무시했다. 20세기가 한참 되어서야 달라진다. 대상과의 거리 하에서 가능하고 중심과 위계를 형성하는 시각과 달리 촉각은 거리도 중심도 위계도 없는 원초적 감각이다.
건축을 촉각의 예술이라고 본 사람은 발터 벤야민이다. 건축미는 접촉하고 사용하면서 감득되는 미라는 것이다. 「대성당」의 '나'는 맹인의 손길을 통해 성당의 아름다움과 촉각의 전율을 동시에 느낀다. 세계 문학사에서 촉각의 미학을 이정도록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 또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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