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잘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 서장훈
1만 3231점. 전 농구선수 서장훈의 득점 기록이다. 은퇴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깨지지 않는 독보적인 기록이다. 한국프로농구가 외국인 용병제를 도입하며 서장훈의 입지가 좁아지지 않을까 우려했다. 아무리 대학농구를 평정한 그였어도 흑인 용병들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1만 3231점이라는 숫자를 보면 그런 우려가 우스워보인다. 그리고 그가 대단해 보인다.
사실 서장훈의 이미지는 좋지 않았다. 나 역시 서장훈이 참 미운 사람 중 하나였다. 내가 고려대 농구부의 광팬이었기 때문이다. 고대는 늘 결정적인 순간에 서장훈을 막아내지 못해 시합에서 졌다. 현주엽은 한국의 찰스 바클리였지만 서장훈을 막기에는 무려 12센티의 키 차이가 났다. 프로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농구에 유리한 신체 조건을 가져 늘 상대편과 상대 팬들에게는 경계 대상 1호였다. 서장훈이 공을 잡으면 관중석에는 늘 조롱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언젠가 상대팀의 심한 파울로 목을 다쳐 보호대를 차고 코트에 설 정도였다.
서장훈이 참 미웠지만 그가 당한 집중 견제를 나열해 보니 나조차도 숨이 막힐 정도이다. 이런 견제를 뚫고 그는 어떻게 KBL 통상 득점 1위의 선수가 되었을까? 그의 언어가 궁금해진다.
승자의 언어: 즐겨서 이루어낼 수 있는 건 단연코 없습니다.
서장훈의 언어이다. 우리가 흔히 써온 문장이 있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내가 논산 훈련소에 입소해 들어간 화장실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이토록 우리는 즐겨라는 말을 자주 한다. 아픈 것도 즐기고 청춘이면 당연히 아파야 할 것 같다. 서장훈의 언어는 달랐다. 그는 매시합이 전쟁이라는 생각으로 준비했다. 전쟁이니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같은 시간에 훈련을 하며 같은 시간에 화장실을 가며 같은 시간에 물을 마셨다. 전쟁이기 때문에 혹독하게 준비한 것이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시합에서 지면 어떻게 했냐고? 유니폼을 버렸다. 혹시 그 유니폼을 다음 게임에도 입고 가면 또 질까 봐, 진 게임의 기운이 유니폼에 묻어 있을까 봐 그냥 버려버렸다. 그토록 자신의 일에 그는 집착했다.
게임에서 이긴 날은 마음껏 즐겼을 것 같지만 그것도 아니다. 이겼을 때는 더욱 심하게 집착했다. 30점은 넣은 날은 '왜 31점을 못 넣었을까' 한탄했다. 20점 차로 이긴 날은 '왜 21점 차로 이기지 못했을까' 억울해했다. 경기 영상을 돌려보며 '내가 저기서 바보짓만 안 했어도, 내가 저기서 몸을 조금만 틀었어도 더 많이 넣을 수 있었는데' 한탄했다. 1만 3231점은 그런 집착의 결과였다.
이제 완전히 이해가 된다. 그가 작은 문제에도 왜 그토록 심판과 다투었는지, 왜 항상 화내는 모습만 중계 화면에 잡혔는지 말이다. 그는 말한다. 제발, 무책임한 어른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너를 응원해' '즐기면 할 수 있어' '즐겨야 성공할 수 있어'라는 말을 듣지 말라고. 자신이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마냥 즐겨라고 하는 건 매우 무책임한 말이라고 한다.
결국 지금의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냉정해지라고 조언한다. 정치인의 말에 속지 말라고 한다. 네가 성공 못한 건 사회의 탓이라는 말을 듣지 말라고 한다. 취업이 안 되는 건 취업이 어려운 세상을 만들어 놓은 세상이라는 말을 믿지 말라고 한다. 어떤 대학을 가든, 어떤 회사에 가든 자신의 가치는 자신이 냉정하게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말이다. 서장훈은 스스로 그 증명을 마쳤다.
패자의 언어: 가만히 있어도 됩니다.
언젠가 시에서 주관하는 센터에서 광고 강의를 한 적이 있다. 6주 동안 나의 강의를 들으면 150만 원이 입금된 복지 카드를 받을 수 있는 혜택이 있었다. 시에서 대상으로 삼은 교육생은 취업준비생들이었다. 1회 2시간짜리 강의를 6주 동안 진행하는 강의였지만 2회 결석까지도 용인이 되었다. 즉, 4주 동안 1주일에 2시간 강의만 들어도 취준생들은 150만 원을 버는 셈이었다.
나의 강의가 부족했던 탓인지 20명 남짓한 교육생 대부분이 2회 결석 찬스를 모두 이용했다. 출석률이 가장 좋았던 날은 복지 카드를 나눠주는 종강일이었다. 단 한명의 학생도 결석하지 않은 날이었다. 나는 학생들의 눈빛이 그토록 반짝였던 날을 보지 못했다. 종강일이 되니 복지 카드에 대한 생생한 질문이 쏟아졌다. '카드를 수령했는데 돈이 들어 있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 '정말 아무 곳에나 써도 되는 카드냐' 등 빈틈이 없는 디테일한 질문이 쏟아졌다. 6주간의 짧은 강의를 마치고 내가 느낀 감정은 비참함이었다. 이것은 절대로 청년을 사랑하는 정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 창업을 하면 누구나 그렇듯 10만 원, 20만 원 버는 것이 정말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회사에 10만 원을 주는 사람은 30만 원 치의 효용을 원했다. 그게 소비자이고 사람의 심리이다. 10만 원, 20만 원도 이토록 소중한데 4주 동안 강의를 들으면 150만 원이 나오니 '과연 이 친구들이 취업을 할까? 창업을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들의 다음 코스는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150만 원 복지 카드를 주는 다른 강의를 수강하는 것이다. 그렇게 눈먼 돈만 찾아다니면 진짜 자신에게 약이 되는 돈을 벌 수 없게 된다. 독이 든 돈만 벌게 되고 거기에 빠지고 만다. 그런 친구들이 '10만 원을 벌기 위해 과연 얼마나 노력할까?'라는 의문이 든다.
언젠가 방송에서 취업 때문에 고민인 친구의 사연을 보게 되었다. '넌 왜 아무것도 안 해?'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상처를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사회자는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되나'라는 말로 그를 위로한다. 그러면서 취업을 잘 안 되는 사회의 탓을 하기도 한다. 물론, 취준생에게 용기를 주고자 하는 사회자의 마음은 이해한다. 내가 그 상황이었어도 취준생을 안심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문장들을 총동원했을 것 같다. 하지만 가만히 있어서 풀리는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뾰족한 답이 없더라도 우선 닥치는 대로 경험해 보라고 말해주었을 것 같다. 도서관에 가서 닥치는 대로 관련 분야 책도 읽어보고 유튜브에서 자료도 찾아보라고 말이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만나는 것도 진로 선정에 도움이 된다는 말도 함께 말이다. 도움이 되고자 하는 사회자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 표현 방식이 조금 잘 못 된 듯하다.
언젠가 영어 공부에 미쳐버린 80대 할아버지를 본 적이 있다. 방안에는 영어 단어를 쓰며 닳아버린 볼펜이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그 할아버지를 보니 나는 영어 공부를 할 시기를 놓쳤다는 생각이 몹시 후회되었다. 저런 노인도 자신의 꿈을 좇는데 나는 꿈을 좇기에 너무 늦은 나이라고 생각한 것이 몹시 부끄럽게 느껴졌다. 세상에 20대 나이에 자신의 꿈을 찾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김연아와 오타니와 같은 사례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꿈과 전공과는 동떨어진 일을 하며 살아간다. 취업 때문에 고민인 그분도 마찬가지다. 우선 부딪혀보라고 말하고 싶다. 어차피 평생직장은 없고 평생직장을 다녀서도 안된다. 그러니 꿈과 상관없이 부딪혀보며 경제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그리고 퇴근 후 시간을 소중하게 써 자신을 찾아가라고 말이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다. '어제와 같은 삶을 살면서 미래가 달라지기 바라는 건 정신병의 초기 증상'이라고 말이다.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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