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광섭의 자명고 (自鳴鼓)] 오판은 평화를 비켜간다

입력 2023-03-10 14:30:00 수정 2023-03-10 17:48:57

지난달 24일 우크라이나 전쟁 1주년 기념행사에서 젤렌스키(왼쪽)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들고 있는 깃발에 병사가 입을 맞추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달 24일 우크라이나 전쟁 1주년 기념행사에서 젤렌스키(왼쪽)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들고 있는 깃발에 병사가 입을 맞추고 있다. AP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사태가 개전 1년을 넘기고 있다. 러시아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 측의 전쟁 피로증을 겨냥하여 고삐를 바짝 당기고 있고, 우크라이나는 결사 항전 의지를 다지는 가운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키이우를 전격 방문하여 단합을 강조하며 추가 지원을 약속했다. 중국과 이란이 노골적으로 러시아에 가세하고 북한도 호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자세다.

사태는 친서방과 반서방의 대리전 성격을 띠며 블록화할 조짐도 보인다. 물가가 폭등하고 민간 피해는 급증하며 수많은 난민이 발생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비극, 과연 불가피하였는가. 여기에는 '억제'가 없고 각자 '자신에게 유리한 오판'만이 있었다.

◆자신에게 유리한 오판

첫째,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확실한 동맹군이 없다는 점에 자만했다. 즉 러시아는 무력 침공 시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개입 의지를 높게 여기지 않았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강제 합병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서방 측이 이렇다 할 통합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EU)이나 나토의 문을 두드렸을 때 반향이 적었다는 점 역시 러시아로 하여금 내전적 성격으로 조기 종결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했다. 그러나 개전 5일 만에 나토 회원국들은 수천 기의 대전차미사일과 수백 기의 대공미사일을 포함한 화약류, 기동·방호장비 등을 제공하였고 2, 3개월이 지나면서 우크라이나군은 전세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핀란드·스웨덴은 중립국의 옷을 벗고 나토 가입을 자원했고, 독일·폴란드 등은 긴급 군비 증강에 나섰다. 사우디도 지원을 공식 표명했다. '나토의 동진과 자국민 보호'라는 러시아의 입지는 좁아지고, 국제사회의 양식은 러시아의 무력 사용 행태에 대한 규탄과 비난으로 점철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년을 앞둔 지난달 22일 러시아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년을 앞둔 지난달 22일 러시아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조국 수호자들에게 영광을'이라는 표어로 애국콘서트가 열렸다. AP연합뉴스

둘째,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손쉽게 합병한 경험 탓에, 우크라이나의 국방력과 국방 의지를 과소평가했다. 러시아는 '대대전술기동단(BTG)에 무인기를 결합한 전술'을 답습한 반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군의 강·약점을 이미 알고 대응하였다. 특히 우크라이나인의 애국심은 전 세계를 정서적 우군으로 만들었다. 현직 대통령은 물론 전직 대통령도 소총을 들었다.

서울팝스오케스트라의 단원 3명은 악기 대신 군복을 입고 전장으로 달려갔다. 개전 한 달도 안 돼 약 6만6천 명의 해외 거주 남성들이 돌아왔다. 대단한 조국애다. 거주민들은 민병대가 되어 게릴라식으로 러시아군을 괴롭혔다. 맥도날드·캔터키프라이드치킨 같은 다국적 회사의 유통망으로 인도적 지원이 쇄도했고, 폴란드는 병참기지를 자임했다.

반면 러시아군은 전선이 신장되자 병력과 물자 조달의 난관에 부딪혔고 고전했다. 교병은 필패(驕兵必敗·강병을 자랑하는 군대나 싸움에 이기고 뽐내는 군사는 반드시 패한다), 우크라이나군은 반격에 나섰고 러시아군은 전략을 수정하였다. 죄수를 투입하고 징집 연령을 낮춘다는 보도와 함께 급기야 푸틴은 전술핵무기까지 거론함으로써 군사강국의 체면을 구기게 되었다.

◆전쟁 억제는 상대를 '압도할 힘'과 '의지'

셋째, 우크라이나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전황은 우크라이나에 결코 유리하지 않다. 무엇보다 서방 측의 힘과 개입 의지는 우크라이나의 기대치에 태부족이었다. 우크라이나는 미국으로부터 2015년~전쟁 발발 이전까지 8년간 24억달러를 상회하는 막대한 군사 원조를 받았다. 이는 군을 현대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발발하고 사태가 장기화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서방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호소함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에서는 과다 지원 여론이 고개를 들고 대선의 주요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프랑스 등 EU는 대화를 할 때가 아니라면서도 협상에 더 무게를 둔다. 전차·항공기와 같은 전투장비 지원에는 미온적이며, 당장 운영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유럽연합의 독자적 리더십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러시아가 나토와 유럽연합의 틈새를 흔들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제 점령지 강제 합병이냐 실지 회복이냐의 대결은, 미국과 서방 측이 과연 언제까지 지원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결국 우크라이나의 항전 여하가 관건인 셈이다.

종합하면, 억제는 상대를 '압도할 힘'과 '의지', 그리고 '신뢰성'으로 달성된다. 우크라이나가 비록 미국의 원조에 힘입어 군 현대화를 추진하였으나 러시아의 침공 의지를 상쇄할 만큼의 '믿음'을 주지는 못하였다. 서방 측은 동맹에 준하는 대러연대나 안보협의체, 강력한 연합훈련과 같은 대안을 구체화하지 못했고, 러시아는 조기 종결을 과신했다.

즉 러시아의 침공을 충분히 예견했으면서도 필요한 안전장치를 마련하지 못한 범서방 측과 우크라이나는 지금 그 후과를 단단히 치르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는 어떤가. 우크라이나와 같은가, 다른가. 교훈이 있다.

◆가치동맹의 중요성 대두

우선 우크라이나는 함께해 줄 동맹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강력한 가치동맹이자 혈맹을 가지고 있다. 절대우위의 억제력 아닌가. 동맹의 '정치적 안정성'을 다지자. 사회 일각에서 주장하는 연합훈련 폐지·전작권 전환·미군 철수·연합사와 유엔사 해체 등은 가치동맹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거부하는 '설익은 평화의 외침'들이다. 북한 노동당의 행동 반경을 넓혀주고, 오직 한국 접수만을 애타게 갈구하는 그들에게 오판의 소지만 줄 뿐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국정에서 지방자치단체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정치권은 물론 국민 모두가 늘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이 있다. 북한 노동당은 자율의 허점, 단속의 약한 고리를 찾아 '지역을 점 기지화'하려 들 것이다. 고정간첩들은 지역의 동태를 살피며 수시로 중앙당에 보고한다. 어떤 보고를 하겠는가. 통일 사업 등에 과잉 정치화되고, 민·군 관계가 허약하며, 민심 이반에 용이한 지역이 어딘가 하는 것 등이 아니겠는가. 지역별 안보 의식과 그 실태를 주기적으로 점검, 공표하여 감히 오판의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자. 안보에는 중앙·지방이 따로 없다.

올해 들어 한·미 군 당국은 핵 확장 억제의 신뢰성을 보장하기 위해 대규모 연합공중훈련을 강도 높게 시행하였다. 앞으로도 후속 조치가 다양한 형태로 강화될 것이다. 나아가 '오죽하면 핵 보유인가'라는 여론도 신중한 가운데 힘을 얻고 있다. 안보의 새 지평을 여는 의미 있는 움직임이다.

윤광섭 예비역 육군 소장
윤광섭 예비역 육군 소장

이제 3월부터 한·미 간 연합훈련을 비롯하여 각급 제대별로는 혹한기 훈련을 끝내고 특성에 맞는 훈련이 본격화되며, 예비군의 향방훈련과 동원훈련이 진행될 것이다. 정부·군사연습도 준비할 것이다. 이 모두가 전쟁 억제 활동이다. 힘을 보태자. 소소한 사건에 과민해지지 말자. 정쟁이 아닌 거국적 지혜를 모으자. 한반도는 우크라이나와 자못 다르다. 그러나 방심은 오판을 불러오고 오판은 평화를 비켜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