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습니다] 박해득 씨의 아버지 고 박맹흠 씨

입력 2023-03-09 11:12:22 수정 2023-03-10 18:51:15

"저희 5남매 성실한 사회인으로 역할, 아버지께서 바르게 사셨기에 가능한 일"

1997년 6월 아버지 고 박맹흠(앞줄 왼쪽) 씨의 정년퇴임식 때 가족이 함께 촬영한 사진. 뒷줄 오른쪽이 박해득 씨. 가족 제공.
1997년 6월 아버지 고 박맹흠(앞줄 왼쪽) 씨의 정년퇴임식 때 가족이 함께 촬영한 사진. 뒷줄 오른쪽이 박해득 씨. 가족 제공.

목욕탕을 갈 때마다 생각납니다. 어렸을 적, 명절에 아버지와 같이 가던 목욕탕 그리고 아버지께서 연세가 들고 건강이 안 좋아 거동이 불편해 지셨을 때 함께 가던 목욕탕, 어릴 때는 아버지를 종종 걸음으로 따라갔고, 아버지께서 연세가 드셨을 때는 제가 부축해 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지요. 지금은 목욕탕에서 연세가 많이 들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뵐 때는 아버지가 생각이 불현듯 납니다.

재작년 양력 7월 5일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던 날은,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주말을 대구 부모님 댁에서 보내고, 근무지인 밀양으로 떠나던 월요일 새벽이었지요. 수년간 진행된 파킨슨병이 심해지고 합병증으로 며칠간 음식을 제대로 삼키지 못하시던 아버지께서 반쯤 세워 둔 침상에서 고개를 숙이고 축 쳐져 계시는 모습을 뵈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말단 공무원 박봉의 월급에 저희 5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공부시켜 사회에 꼭 필요한 일꾼이 되게 하셨지요. 위로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부양하고 또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4명의 어린 동생들을 뒷바라지하며 결혼시키고, 6·25 전쟁에 군복무 중 전사한 큰집 사촌형(외아들)을 대신해서 큰집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부양하며 얼마나 고된 삶을 사셨습니까?

또한 저희 5남매에게는 엄한 아버지이시고 늘 근검절약을 말씀하셨지만 일가친척들과 주변 분들에게는 도움을 주고 베푸는 삶을 사셨지요. 또한 새벽에는 집 앞 동네 쓰레기를 치우시는 등 부지런하셨는데,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동네에 사시는 한 어르신이 아버지를 회상하던 말씀을 하실 때, 평생을 한결같으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아버지! 제가 장남이기에 기대를 많이 하셨지요. 육군사관학교에 가겠다는 저를 두고 "왜 힘들게 직업군인이 되려 하느냐"며 일반대학을 가라고 말씀하셨지만 전 고집을 부려 육사를 지망했지요. 아버지는 그 때 "네가 원하면 그렇게 해라"고 승낙하셨습니다.

87년 3월 초 기초 군사훈련 후 가진 입교식에서 부모님과 면회를 할 때, 아버지께서는 제 양 손에 낀 하얀 면장갑을 벗기시고, 손과 손등에 난 여러 상처를 보시고는 처음으로 제 앞에서 눈물을 보이셨는데, 그 때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후 군 생활 중에 전역기회가 주어지면 사회로 나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을 때 아버지는 제 근무지까지 한걸음에 달려오셔서는 제 뜻을 다시 물어보셨었지요. 그 뒤 "네 뜻대로 해라"고 하시며 제 뜻을 존중해 주셨습니다. 지금 저는 50대 중반이 넘는 나이인데, 당시 저보다 훨씬 잘하고 있는 자식들을 못 믿고 이런 저런 잔소리를 수시로 하는데, 아버지 뵙기에 부끄럽습니다.

아버지! 서울에서 취업준비를 하며, 여러 직장을 도전한 끝에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 만 27년이 되어 갑니다. 입사 후 5년이 되던 해, 차장시험에 차석으로 합격했을 때, 당시 아버지께서는 심부전증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와 함께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께 기도를 하시는 등 정성을 다해 주셨지요.

그리고 그 이후에도 저희 5남매가 잘 되도록 당신의 시간과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으셔서 그 결과 5남매뿐만 아니라 배우자들, 11명의 손주들도 현재 성실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잘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아버지께서 저희들의 등불이 되어 주셨고 참되고 바르게 사셨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11년 전, 부장으로 승진 후 대구로 발령받아 서울에 가족을 두고 대구 부모님 댁에서 3년 생활할 때가 제게는 참 좋았습니다. 물론 주말에 쉬지 못하고 같이 시골에 일하러 갈 때는 힘들었지만 제가 일하는 회사 사무실을 방문하시고, 영화 '명량'도 같이 보고 대구 3호선 개통 후 같이 모노레일을 타고 종점과 종점 사이를 다녔던 것 등등 그 때가 아련히 그립습니다.

아버지께서 좀 더 일찍이 병을 치료하시고 건강을 돌보게 했더라면 더 오래 건강하게 사시고, 저희들도 아버지께 죄송스러움을 덜할 텐데, 지금 돌아보면 그 때 아버지를 더 설득하지 못한 아쉬움이 큽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80세가 넘는 나이에 불편한 몸으로 댁에서 아버지 간병을 3년 이상 정성스럽게 하셨는데, 지금도 아버지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고 안타깝다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고생을 많이 하신 것을 누구보다 어머니께서 잘 아시기에, 맛있는 것을 드시거나 좋은 경치를 보시면 늘 아버지 생각부터 하십니다.

아버지! 지금 그곳에서 잘 계신지요? 저희들도 아버지 뜻을 잘 헤아려서 생활하고 어머니를 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께서도 항상 어머니와 저희들을 지켜봐 주십시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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