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간첩 천국

입력 2023-01-17 18:29:21 수정 2023-01-17 19:17:02

정경훈 논설위원
정경훈 논설위원

서독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1969년 집권하면서 동독 포용 정책인 '동방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1960년대부터 서독 사회에서 동방정책에 대한 '논란 속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국가 체제를 위협하는 범죄 행위'의 구체적 규정을 완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형성됐다. 1968년 제8차 형법을 통해 국가 안보 관련 법규 내용을 완화해 처벌 요건을 엄격하게 제한한 배경이다.

제8차 형법 개정은 1951년 제1차 형법 개정으로 마련된 체제 위협 범죄의 성립 요건이 법치주의 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수용한 것이지만, 서독 내부에서 공산주의의 위협이 예상보다 미미하다는 재평가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동독 간첩의 서독 사회 침투에 대한 경계심을 해제했다.

적발된 간첩 사건에 대해 서독인들은 '공작 활동은 모든 국가가 다 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일상적인 것으로 치부했다. 이런 무사안일은 서독이 1970~1973년 동유럽 공산국가들과 관계 정상화 조약을 체결한 이후 더욱 확산됐다. 서독 연방범죄수사청(BKA)은 1984년 동독 간첩의 위협에 대한 국민 인식 수준을 이렇게 평가했다.

"동독 공작원들의 활동은 서독 전역에 만연한 '둔감한 태도'(지각 능력 상실)로 수월해진 측면이 있다. 동독의 간첩 활동과 이로 인한 국가 안보 위협에 대한 심각한 수준의 무지와 안일한 태도는 일반 국민들을 포함해 재계·정부·정당 등 서독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반면 헌법보호청(BfV) 등 방첩 기관은 서독인들에게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기관이라기보다 자유민주주의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 인식됐다. 몇몇 '간첩 조작 의심 사건'을 침소봉대해 국정원을 민주주의 파괴 조직으로 매도했던 우리의 이른바 민주화 세력의 망동(妄動)과 빼다박았다.

이런 사실(史實)은 우리에게 남한 내 간첩 활동에 얼마나 경각심을 갖고 있느냐고 묻는다. 지금도 간첩의 암약에 무감각하고 방첩 기관을 '간첩 조작' 조직으로 의심하고 매도하지 않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무엇보다 문재인 정권이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폐지한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도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