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로 읽는 전쟁 톡톡] 산남의진 ‘입암전투’, 피로 물든 가사천

입력 2022-12-02 14:30:00 수정 2022-12-02 17:36:29

순국선열들과 무명 의병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을 기리기 위한 제10회 산남의진 순국선열 추모식이 지난 10월 29일 영천시 자양면 충효재에서 열렸다.
순국선열들과 무명 의병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을 기리기 위한 제10회 산남의진 순국선열 추모식이 지난 10월 29일 영천시 자양면 충효재에서 열렸다.
김정식 육군삼사관학교 명예교수
김정식 육군삼사관학교 명예교수

1905년 11월, 일제는 대한제국의 주권을 강탈했다. 분노에 찬 백성들이 일제를 향해 몸을 던졌다. 국가 존망의 위기가 고조되던 1906년 초봄, 영천 포항 등 동해남부 지역 1천여 명의 민초들이 정용기를 중심으로 산남의진을 창의한다. 동해로 북상하여 관동에서 다시 서울로 진격해 나가 국왕을 지킨다는 원대한 목표였다.

그후 흥해, 영덕, 청송 등지에서 1년여 항일 전투를 벌여 오던 산남의진은 1907년 시월 초이렛 날 매현에 도착했다. 일본 군대가 입암으로 들어간다는 정보를 입수한 정용기 대장은 서둘러 입암에서 동쪽으로 한 마장 정도 떨어진 가사천 상류의 매현을 전진기지로 삼고 외지로 나가 있는 의진들을 기다렸다.

드디어 군장비를 정비한 정용기 대장은 본진의 부장들에게 작전 임무를 부여한다. "제장들은 어둠이 내리면 은폐하여 입암마을로 이동하라. 기도비닉(아군의 작전을 적이 모르게 준비해 실행한다는 뜻)에 최대한 유념하라. 특히 이세기는 서쪽의 광천으로 나가 매복하고 있다가 적 포위망을 좁혀 가라. 본진은 길목을 가로막고 도주하는 적들을 요절낼 것이다."

일본군이 입암에서 유숙할 것을 확신한 정용기는 새벽녘에 기습적으로 타격, 섬멸할 계획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주먹밥으로 저녁을 마친 이세기는 대원을 인솔하여 입암으로 향했다. 부스럭거리는 발걸음마다 위험과 긴장이 뒤따랐다. 하나둘 등불이 꺼지자 산촌의 밤기운은 더 쌀쌀하였다. 시린 손을 비비면서 안동권씨 재실(영모각) 가까이에 이른 이세기는 마을 지도를 펼치고 대원들을 매복시킬 준비를 했다. 그때 어스름이 깔린 갯도랑에서 한 촌부가 숨을 죽이면서

"영모각 대청마루에 일본군들이 올라 앉아 쉬고 있습니다요" 하면서 두려운 기색을 보였다. 순간 이세기는 격분하여 '그래, 때가 왔어. 지금이 적기야' 하며 밤이 더 깊어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선제공격을 감행한다.

"사격하라! 따당, 따당!! "

그러나 적이 몇 명 되지 않을 것으로 여긴 예측은 빗나갔다. 적정을 오판한 이세기는 영모각 주변에 잠복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되레 포위되고 만다. 그때, 계획된 시각이 채 되기도 전에 입암 쪽에서 들려온 요란한 총소리를 들은 정용기 대장은 불길한 생각이 엄습하여 새벽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출동 준비!"

이미 자정을 넘긴 밤하늘의 별은 슬프도록 푸르기만 하였다. 정용기 대장은 본진의 군사를 이끌고 영모각 주변에 이르러 화망을 구성한 뒤 정신없이 총탄을 퍼부었다. 한참 격전이 일더니 더 이상 적진에서 아무런 응사가 없이 잠잠해졌다. 정 대장은 그제야 공격을 멈추고 "적들이 모두 소탕되었다. 더 이상 도망치는 자들도 없는 듯하니 모두들 선바위 방향으로 철수하라"고 했다.

정용기 대장은 대원들을 이끌고 입암서원이 있는 가사천 길가로 철수하여 주막으로 집결하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를 끝낸 대원들을 격려할 생각이었다. 밤기운을 타고 마른 낙엽들이 우두둑 떨어져 내렸다. 돌부리를 흔드는 물소리는 산촌의 고요를 선잠으로 몰고 갔다.

영모각에 머물던 일본군 청송수비대의 미야하라 소대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응전하는 척 시늉만 하며 재실의 마룻바닥 밑으로 납작 엎드려 몸을 숨기고 상대의 오판을 유도했다. 사지에서 겨우 목숨을 보전한 일본군은 전열을 재정비한 뒤 은밀히 산남의진의 동선을 추적한 다음 일제히 주막을 급습한다.

"따당! 따당! 따당!…."

잠든 협곡의 산과 개울을 놀라게 하는 총성이 수없이 울렸다. 마을도 놀라 소와 개들이 마구 울부짖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가사천 가의 주막집에서 붉은 피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아비규환이었다.

음식을 앞에 둔 의진들은 일본군의 기습에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정용기 대장은 물론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던 이한구, 손영각, 권규섭 등 제장들이 한순간에 쓰러지고 만다. 한밤의 총성에 놀란 가사천에 피의 강물이 흘러넘쳤다.

사(私)를 던지고 오로지 의(義)의 기치로 분연히 나서는 데는 그것을 지켜낼 만한 실전적이고 전문적인 역량이 요구된다. 동서양의 전쟁사는 그렇지 못했던 사례들을 주저하지 않고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비록 흑역사로 읽힐지라도 말이다. 의분을 행동으로 옮기는 대의 앞에는 언제나 냉정의 추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진영이 무너질 상황에 이른 산남의진은 마침내 정용기 대장의 아버지 정환직이 나서 위기를 넘긴다. 그리고 그후 정환직마저 전장에서 체포되어 참살당하지만 갖은 시련을 극복하면서 1908년까지 동해 북부지역의 일경과 일군에 끈질기게 맞서 싸웠다. 의(義)의 발로였고 자주적인 민의 힘이었다. 그 죽음 위에 영원을 담보하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 오늘이 있게 된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