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김춘수의 곁에 ‘오래 머물렀던 정신들’

입력 2022-11-17 17:47:07 수정 2022-11-21 07:30:41

손진은 시인

손진은 시인
손진은 시인

김춘수는 옛적 우리나라에 목화씨를 가져온 조상 문익점처럼, 우리 토양에 새로운 시의 씨앗을 뿌려 시단에 떨림을 주고 지진을 일으킨 시인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그의 시 '꽃'을 외워주면 연애가 시작되게 했을 것 같을 정도로 '앎'을 눈부시게 한 시인이다. 그러나 일반의 기대와는 달리 그는 그 세계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꽃'의 세계에 안주할 때 릴케가 이룩해놓은 세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걸 직감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40대에 접어들면서 김춘수는 새로운 시험을 그 자신에게 강요하기 시작한다. 이미지 위주의 서술적인 시세계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이다. 이른바 '무의미시'로의 진입이다. 이런 시는 다소의 난해성으로 독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시에 불편함을 느끼는 독자대중들의 반응에 별로 개의하지 않고 반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그 세계에 몰두했다,

지루하다면 지루했을 그 시기, 김춘수가 곁에 두고 싶어 한 인물은 누구일까? 비극적인 삶 속에서도 자발적인 가치를 선택하고, 그 가치를 지향해 나가는 가운데 내적인 고난의 댓가를 지불하는 인물들이다.

그가 가장 의식했던 시인은 김수영이다. 어떻게 보면 무의미시를 추구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가 김수영이며. 무의미시는 김수영과 다른 길을 가기 위해 스스로 밀고 가게 된 시 형식이다. 그는 김수영과 자신이 예술가로서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오는 결벽증과 강박관념이 닮았다는 걸 알면서도, 직장을 안 가질 만큼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데까지 가지 못하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사회적인 체면, 눈치도 좀 보고, 남의 시선을 수영보다 좀 더 느끼는 편이지요."(김춘수, 홍영철 대담)

샤갈은 유대인에 대한 엄청난 박해 속에서 평생을 유랑민으로 살아왔지만, 어린 날 고향의 소 외양간에서 본 송아지의 눈망울에 담긴 산과 들, 그리고 사람과 밤의 촛불과 하늘의 낮달, 이승의 밝음과 따뜻함이 그를 변화시켰다. 샤갈의 '나의 마을'이라는 그림이 김춘수의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새로 돋은 정맥(靜脈)이/바르르 떤다"는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보라. 시 '내가 만난 이중섭'의 화가 이중섭도 빼놓을 수 없다.

"예수 때문에 못은 신화가 되었다. 육체의 아픔은 마음의 아픔보다 압도적으로 더 크다. 예수의 손바닥에 박힌 못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김춘수는 예수의 위대성을 한 인간이 거부할 수도 있는 육체적인 고통을 정신의 고귀함을 위해 견디어 냈다는 데 둔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고통 넘어서기'를 김춘수가 주목한 것도 여기에 있다. 그는 '죄와 벌'에 나오는 '소냐'를 두고 "육체는 무너졌는데도 영혼은 말짱하다. 슬라브 민족의 피 속에는 그런 괴물스런 패러독스가 숨어 있다"고 표현한다.

김춘수가 실존적인 고민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과정에서 만난, 시작 생활을 끝까지 버티어내게 한 인물들 김수영, 샤갈, 이중섭, 예수, 도스토예프스키를 생각한다. 이 가을, 내 곁에 오래 머물고 있는 정신은 누구인가? 그분들의 온기를 쬐며 나는 이 추위를 견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