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킹 처벌법 1년] 스토킹 당하는 데 증거 더 내놔라?…미온적 대처가 범죄 부추긴다

입력 2022-11-16 16:11:36 수정 2022-11-16 21:32:20

수성구 임대아파트 거주 30대 여성, 옆집 남자에 스토킹 피해 호소
대구도시개발공사, 논란일자 뒤늦게 동·호수 변경
여성계 "피해자와 가해자를 즉각 분리시켜야"

서울 신당역 살해 피의자 전주환이 남대문경찰서에서 검찰로 이송되고 있다. 경찰은 신당역 여자 화장실에서 스토킹하던 20대 여성 역무원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한 전주환을 검찰로 송치했다. 연합뉴스DB
서울 신당역 살해 피의자 전주환이 남대문경찰서에서 검찰로 이송되고 있다. 경찰은 신당역 여자 화장실에서 스토킹하던 20대 여성 역무원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한 전주환을 검찰로 송치했다. 연합뉴스DB

스토킹처벌법을 도입한지 1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스토킹 가해자의 범죄 수법은 갈수록 교묘해지는데 반해 경찰의 처벌은 미비해 2차 가해로 이어지는 사례가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스토킹 범죄에 대한 공공의 인식도 예전과 달라진 게 없다. 일부 피해자들은 보복이 두려워 공공기관에 도움을 청하기도 하는데 스토킹 민원에 대한 대처가 늦어지기 일쑤다.

대구의 한 임대아파트에 거주하는 30대 여성은 옆집 남성의 집요한 스토킹 탓에 경찰과 대구도시개발공사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매일신문의 취재가 시작되기 전까지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했다.

◆옆집 남성의 스토킹, 악몽된 일상

수성구 한 임대아파트에 거주하는 여성 A(32) 씨의 악몽이 시작된 건 지난해 11월부터다. 60대로 추정되는 옆집 남성은 두 달 넘는 기간 동안 아파트 복도에서 A씨의 출‧퇴근 시간에 맞춰 기다리고 있거나 말을 걸었다. A씨가 거절의사를 밝혀도 B씨는 "냉정하다"며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올해 1월 A씨가 경찰에 신고하면서 잠잠했던 가해자의 행동은 6개월 후부터 다시 시작됐다. 지난 6월부터 해당 남성은 매일 현관문을 열어둔 채 출퇴근하는 A씨를 쳐다봤고, 7월부터는 성적 욕설과 침을 뱉었다.

10년 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2살 어린 여동생과 임대아파트에 사는 A씨의 공포감은 날이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었다. A씨는 경찰에 추가 신고를 하기도 꺼져렸다. 혹시라도 가해자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보복할까 너무 두려웠다.

고민 끝에 A씨는 대구도시개발공사에 거주지를 옮겨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공사의 답변은 황당하기만 했다. 공사 측은 다른 임차인들도 이웃 간 갈등이 많아 거주지 변경을 해줄 수 없으니 경찰에 신고하라고 답했다.

A씨는 "보복 행위가 두려워 신고를 못하고 있는데 경찰에 신고하라고 하니 답답한 심정이었다"며 "복도식 아파트 바로 옆집이라 외출할 때마다 남성의 집을 지나칠 수밖에 없다. 두려움과 불안감으로 정신과 약물치료를 받고 있다"고 호소했다.

◆대구도시개발공사, 취재시작되자 뒤늦게 변경

대구도시공사는 임대아파트 주민들 사이 동‧호수변경 민원이 수시로 들어오기 때문에 명확한 증거 없이는 동‧호수를 바꿀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대구도시개발공사의 '동호변경기준안'에 따르면 세대 변경은 장애인, 노약자 등의 편의시설 설치 등이 필요할 때, 가족 수가 증감할 때, 화재 등이 일어날 때 가능하다. 지난 2020년 기준안이 한 차례 개정되면서 이웃 간 분쟁세대의 경우 증빙자료를 제출해야 한다는 안이 신설되기도 했다.

공사 관계자는 "스토킹과 관련된 규정은 없고 경찰의 협조 공문이 오거나, 흉기로 위협하는 등 이웃 간 분쟁이 위험한 상황일 때에만 세대 변경이 가능하다"며 "한 해 동호 변경을 하는 경우는 10세대 미만"이라고 설명했다.

대구도시개발공사는 취재가 본격화되자 뒤늦게 A씨의 거처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공사 측의 미온적인 대응이 자칫 A씨의 피해를 더 키울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도시공사 관계자는 "인사이동으로 새로운 담당자가 왔는데 새 담당자는 동·호수 변경이 가능하다고 판단해서 변경을 해줬다"고 해명했다.

대구여성회 관계자는 "성적 욕설까지 하는 경우라면 스토킹 행위가 더 발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피해 여성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며 "증거를 요구하는 건 뒤늦은 대처다. 선제적인 대응이 없었기에 서울 신당역 사건 등이 일어난 것"이라고 강조했다.

◆갈수록 교묘해지는 스토킹…여전히 대응은 부실

스토킹 가해 수법은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 여성단체 측은 피해자를 협박한 증거물을 남기지 않기 위해 중국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거나 제3자를 통해 피해자에게 접근하는 등 예측할 수 없는 행위를 이어온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대구여성의전화 부설 여성인권상담소 피어라 관계자는 "요즘 가해자들은 중국 애플리케이션인 '위챗'을 통해 피해자를 협박한다. 위챗은 대화 내용을 삭제하면 흔적이 남지 않는데 이 점을 이용하는 것"이라며 "스토킹 범죄는 증거물 여부에 따라 가해자에 내려지는 형량 차이가 큰데 교묘해지는 가해자들로 처벌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문제는 경찰의 스토킹 처벌이 여전히 미흡하고, 대응도 부실하다는 것이다. 대구 여성단체에 따르면 대구에서 지난 2016년부터 2017년까지 30대 여성을 스토킹하고 불안감을 유발하는 문자메시지를 꾸준히 전송해 법원의 접근금지가처분 결정을 받은 40대 남성이 지난해까지 스토킹을 이어오는 일이 발생한 사례도 있다. 해당 남성은 거주지에서 총 119회에 걸쳐 "널 사랑했다, 부부처럼 생각했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거나 문자 메시지를 전송했다.

여성 성폭력을 상담하는 한 복지사는 "여전히 접근금지를 어기는 경우가 많은데 거처를 옮기지 못하는 이상 피해자가 가해자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는 제도는 없다. 스토킹 가해자는 경찰의 조치를 받아도 본인이 피해자를 찾아가고 싶으면 찾아가고, 범죄를 저지르고 싶으면 저지른다"고 했다.

◆피해자, 가해자 분리가 답…스토킹 인식 개선도 필요

정부는 지난 9월 스토킹 범죄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처벌하지 않았던 '반의사 불벌죄'를 폐지하는 등 대대적인 법 개정에 나섰다. 개정안에 따르면 반의사 불벌죄 삭제와 더불어 잠정조치 단계에서도 가해자에게 위치추적 전자장치를 부착할 수 있다. 여성단체들은 초동 대처를 강화해 피해자와 가해자를 즉각 분리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여성인권상담소 관계자는 "초동 대처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이미 자극받은 가해자가 추후 어떤 행위를 이어갈지 모른다. 위치 추적 장치도 경찰이 피해자 곁에 24시간 있지 않은 이상 범죄를 막기 어렵다"며 "반의사 불벌죄가 폐지됐다고 해도 피해자 불안감이 낮아진다고 볼 수 없다. 즉각 가해자와 분리되지 않으면 피해자가 느끼는 불안감은 어느 대책이라도 해소할 수 없다"고 했다.

피해자들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공포감을 '스토킹'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대구 여성장애인 통합상담소에 따르면 부부가 가정폭력 등으로 이혼한 후 아내가 남편으로부터 스토킹 당하는 경우도 상당하다. 문제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집안일'로 치부하며 주변의 도움을 꺼린다는 점이다.

대구 여성장애인 통합상담소 관계자는 "부부가 이혼하면 법적으로 남이 되는데도 남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여전히 스스럼없이 집에 찾아오고 가정폭력까지 행하는 경우가 많다"며 "피해자 역시 가족일이라며 신고나 상담을 주저한다. 이는 명백한 스토킹 범죄라는 인식이 더 널리 알려져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