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인화의 온고지신] 신라왕경은 살아있다

입력 2022-11-17 14:30:00 수정 2022-11-17 17:40:11

이인화 전 이화여대 교수,소설가
이인화 전 이화여대 교수,소설가

신라왕경이란 신라의 왕이 거주하던 수도를 일컫는 말로 오늘날 경주시 및 그 인근 지역을 뜻한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왕경이 "가옥 17만 8936호에 동네가 1360방이었고, 주위가 55리였다. 지붕을 금으로 장식한 집(금입택)이 35개 있었다."고 나온다.

이 기록에 따르면 서라벌, 즉 신라왕경은 8세기 바그다드, 콘스탄티노플, 장안을 능가하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현대 한국인들은 <어쌔신 크리드>라는 게임을 통해 8세기 바그다드의 구석구석을 잘 안다. <크루세이더 킹>의 콘스탄티노플과 <삼국지 11>의 장안도 잘 안다. 그러나 정작 신라왕경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산다.

신라왕경은 한 지방, 한 국가가 밑바닥으로부터 글로벌 원탑으로 상승하는 비밀을 안고 있다. 이 비밀은 아마도 현대 한국인의 무의식에 살아 있을 것이다.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친 신라는 지리상 중국의 선진 문물과 직접 교류하기 힘들었다. 그 결과 신라는 3세기 전반까지도 '진한'이라 불리던, 삼국 중에 가장 가난하고 낙후된 고대국가였다.

신라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5세기까지 고구려의 간섭을 받아야 했다. 6세기에는 관산성 전투 등으로 잠깐 공세를 취했으나 7세기에는 고구려, 백제, 말갈, 일본에 의해 사방에서 포위되어 공격당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신라는 국내정치도 한심했다. 진지왕의 폐위에서 보듯이 왕권이 극히 불안정했다. 골품제라는 혈통적 구획은 왕위계승과정에 갈등을 더할 뿐이었다. <삼국사기> 대세와 구칠의 예처럼 '이 좁은 신라 땅'을 혐오하여 떠나는 지역 청년층의 인구 유출이 심했다.

비리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다가 동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검군의 예처럼 군대도 썩었다. 칠숙, 석품, 실혜, 설계두, 김후직 등의 사례는 왕이라는 리더십 자체를 믿을 수 없는, 내부의 갈등과 혼란상을 보여준다.

654년 8월 고구려, 백제, 말갈의 연합군은 대대적인 포위 공격을 전개해 신라의 33개 성을 함락시킨다. 신라는 도비천성(현 추풍령)을 빼앗기고 낙동강 전선까지 흔들리기에 이른다. 안팎이 다 암담한 신라에는 어떤 희망도 없어 보였다.

여기서 역사의 반전이 일어난다. 귀족들이 파벌 싸움을 멈추고 그토록 싫어하던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한다. 모두가 김춘추와 김유신, 평생 변치 않은 우정으로 결속된 두 지도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대반격에 나선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하고 매초성 전투와 기벌포 해전에서 당나라를 격파하여 676년 삼국 통일을 이룩한다.

혹자는 이 대반격이 당나라와의 동맹 때문이며 이는 민족 분쟁에 외세를 끌어들인 매판 행위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에 이르는 140년 동안 극한의 상쟁을 벌인 고구려, 백제에 대해 신라의 우호적인 민족 감정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나당동맹은 신라 생존의 유일한 길이었던 것이다.

당시 돌궐, 거란, 말갈, 고창, 고막해, 해, 설연타, 남실위, 지두우, 토욕혼, 달막루, 토번 등 수나라 당나라와 동맹하여 민족 내부의 다른 세력을 제압했던 민족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마지막에 당나라를 축출하고 완전한 독립을 쟁취한 것은 신라 뿐이다.

신라에는 자신의 후진성을 자각한 나머지 언제든지,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투철한 개방성이 있었다. 이 개방성이야말로 나당동맹이 성공적이었던 이유이며 기적의 대반격이 가능했던 이유이다.

신라는 일찍부터 외국인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불교를 전한 묵호자는 신라인과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 승려였다. 진흥왕 때는 고구려 승려 혜량을 모셔와 신라의 승통으로 추대했다. <처용가>의 처용도 아라비아 상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통일 후에는 신라의 많은 유학생과 구법승들이 중국, 티베트, 중앙아시아, 인도로 진출해서 외국인과 교류하고 선진 문물을 학습했다. 많은 중국인, 일본인, 소그드인, 페르시아인, 아라비아인들이 신라를 찾았다. 이 과정에서 서책과 약품과 공예, 즉 새로운 과학기술이 유입되었다.

신라는 이를 토대로 자신의 고유한 문화를 창조했다. 일본과 중국의 조선기술로는 만들지 못했던 '신라선', 당나라 황제 대종이 극찬한 정밀 공예품 '만불산', 세계 최고의 종이라고 평가받던 '계림지' …… 신라의 빛과 영광은 헤아릴 수 없다.

오늘날 한국은 상품 교역의 비중이 축소되고 서비스 교역이 증가하는 선진국형 교역 구조로 변해가고 있다. 4차 산업 신성장기업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인재와 자본을 빨아들이는 수도권 일극화 인구 소멸도 나타나고 있다. 이를 극복할 방법은 지방에 수도권과 대등한 혁신 신성장 산업을 이식하는 길뿐이다.

이 어렵지만 가장 확실한 길의 모델이 신라왕경이다. 신라가 걸었던 개방의 길이 경북 생존의 길인 것이다.

과거에는 개도국이 선진국의 기술을 수입하는 것이 기술 도입이었지만 오늘날은 선진국이 개도국의 우수 두뇌를 수입하는 것이 기술 도입이다. 경북은 헝가리,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인도, 베트남의 우수 두뇌들이 와서 낮은 비용으로 고부가가치의 지식서비스상품을 만드는 지역이 되어야 한다. 코딩을 잘하는 한 사람의 개도국 혁신 인재가 지역에 양질의 일자리 100개를 만든다.

신라왕경 디지털 복원 및 메타버스 사업이 국회에 올라가 있다. 우리는 조만간 온라인 가상공간에서 80억 세계인과 함께 신라왕경을 걸을 것이다. 규범의 아노미 상태에 빠져 있던 지역이 절망하지 않고 대반격으로 글로벌 원탑이 되었던 영광의 도시. 개도국 혁신 인재들이 메타버스에서 접속하고 선망하는 도시. 신라왕경은 살아있다.

소설가 이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