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 보랏빛 정원

입력 2022-11-17 10:39:09 수정 2022-11-19 06:54:39

나팔꽃이 입을 다무는 때(전영숙/ 도서출판 지혜/ 2022)

그녀가 웃는다. 긴 생머리 뽀얀 얼굴, 시집 표지 날개 속에서 밖을 보는 눈매가 곱다. '첫 설렘으로 다음을 꿈꾸기 때문'이리라 짐작해 본다.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은 보라색 표지, 전영숙 시집 '나팔꽃이 입을 다무는 때'는 꽃과 나무들이 각각의 색을 펼치는 정원이다. 제비꽃, 노루귀, 라일락, 제라늄, 백합, 사루비아, 코스모스…. 꽃이 웃는다.

전영숙 시인은 경북 김천 출생으로 2019년 '시인시대'로 등단했으며 물빛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평범한 일상어를 참 곱게 벼린다.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만나는 사물을 작품화 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쉬운 말로 살아있는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다.

그녀가 바라보는 꽃과 나무들 그 너머엔 사랑하는 이가 웃고 있나 보다. 세상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섬세하고 다정하다. "새끼 제비가 바닥에 떨어졌다/ 제비꽃들이 일제히 뒤꿈치를 들고/ 하늘을 향해 두리번거렸다/ 날아가는 새 떼에게 신호라도 보내는 듯/ 가는 몸이 끊임없이 흔들렸다/ 태어난 몸이 다르지만/ 저 둘은 이름을 나눠 가진 사이/ 보랏빛 근심이 온 마당 가득 번졌다"(12쪽, '보랏빛 근심' 전문)

꽃들이 줄을 서 뒤꿈치를 들고 나무들이 숨을 쉬고 말을 걸어오는 듯하다. 삶과 사물의 모든 순간이 아름답고 숭고하다. 대를 이어 흐르는 시적이고 따스한 인간애가 독자의 마음까지 환하게 한다. 나무의 마음까지 헤아리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삶이 시인의 가슴에 고스란히 남아 일상 속에 만나는 사물들과도 소통하는 것이리라.

"늙은 살구나무를 밤에 벴다/ 번쩍이는 톱날이 보이지 않게/ 모두가 잠든 밤에 톱질을 했다/ 달빛에 걸려 톱이 휘청거렸다/ 빛이 휘는 소리가 났다/ 어둠이 습자지처럼 떨렸다/ 톱날이 나무의 속을 다 통과해 나올 때까지/ 얼마나 마음을 오그리고 있었는지/ 아버지 굽은 등이 한 자나 더 굽어 보였다/ 나무가 희미하게 살구 향을 풍겼다/ 잘린 나무 앞에서 아버지는 두 번 절을 했다"(84쪽, '톱날이 보이지 않게' 전문)

'나팔꽃이 입을 다무는 때'는 전영숙 시인의 첫 시집이다. 읽다 보면 마음이 풋풋해지고 분홍 꽃물이 든 듯하다, 시어(詩語)들이 둥글고 따스해서 서늘하기도 하다. 거듭해서 읽어도 미소가 번진다.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참 좋다는 말이 나온다. 가고 없는 봄과 다시 올 봄이 공존한다. 보랏빛 정원 속에서 그녀가 웃고 있다.

강여울 학이사독서아카데미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