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 보면 시간의 흐름이 달라진 걸 느낄 때가 많다. 공간을 이동했을 뿐인데, 하루가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지. 그럴 때마다 생각해본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도시 공간이 나에게 어떤 곳이며, 이곳에서 보내는 내 일상의 시간은 어떤 의미일까. 과거부터 이 도시를 살아간 사람들의 시간은 지금 우리들의 시간과 얼마나,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겹쳐 있을까.
지난달 북성로를 중심으로 한 구도심에서 펼쳐진 '대구예술 공간여행 환상도시 유람단'은 바로 이런 물음에서 출발한 행사였다. 대구의 구도심에 위치한 북성로는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기라는 대한민국 역사의 중요한 시간이 중첩된 지역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한 옛 예술인들의 아카이브 자료들을 바탕으로, 청년 예술인과 시민들이 함께하는 입체적인 시공간 여행을 설계해보기로 했다.
일제강점기 대구가 낳은 작곡가 박태준과 작사가 윤복진, 작곡가 김진균, 시인 이상화와 이육사, 백기만, 화가 이인성, 시인 구상과 화가 이중섭…. 이들이 전국에 이름을 알리며 예술 활동을 펼치기 시작하던 시기, 그들은 20~30대 청년이었다. '그 시기' 청년 예술가가 남긴 예술자료를 '현재의' 청년 예술가들과 만나게 하면 어떤 창작물이 나올 수 있을까.
해답을 찾기 위해 먼저 북성로를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는 청년 기획자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근대기 예술인들의 악보, 책, 사진, 옛 문화공간과 관련된 아카이브 자료들을 공유했다. 그들과 함께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장르의 청년 예술인들을 모아보기로 했다.
대상 공간은 대구시가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매입한 옛 꽃자리다방과 대지바, 경북문학협회, 무영당 그리고 적산가옥을 활용한 창의공간 온으로 좁혔다. 그리고 역할을 나눴다.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팀은 아카이브 자료와 공간 정리를 맡고, 세부 행사 기획과 진행은 모두 청년 기획 그룹들이 맡기로 했다.
총감독, 연출, 영상, 진행을 맡을 사람들과 장르별 청년 예술가들이 정해지고, 출연팀별 회의 일정이 잡히기 시작했다. 나름 지역 문화예술계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의 입장으로 참가한 첫 회의, 아카이브 자료를 받아 든 청년들은 진지했다. 자료 해석에 대한 고민과 이어지는 토론, 아직 날 것 그대로인 공간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들…. 그날 이후로 필자는 '무조건' 그들의 선택을 믿고 뒷받침해주기로 했다.
청년 예술가들은 각 공간별 두 팀씩 총 10개 팀이 격일로 행사를 맡기로 하고, 각각 창작의 시간을 가졌다. 뜨거운 여름의 열기가 남아있던 9월에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날 것 그대로'의 공간을 뛰어다니며 사전 영상을 촬영했다. 그동안 정돈된 무대에만 올랐을 것 같은 이들도 먼지와 땀이 뒤섞이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 과정을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트레일러를 포함한 여섯 편의 영상이 완성됐다.
기획과 연출, 출연, 영상, 진행 등 맡은 부분은 달랐지만, 행사에 임박해서부터는 역할을 가리지 않고 서로 힘을 보탰다. 그 결과, 10월 12일부터 15일까지 나흘간 '환상도시 유람단' 참가자들은 꽃자리다방, 대지바, 경북문학협회, 무영당, 창의공간 온으로 '유람'하며 각 공간별 아카이브를 재해석해 준비한 청년들의 창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윤복진의 동요 '기럭이'를 근대 가요와 섞어 멋진 창작곡을 선보인 국악 그룹 나릿, '물새발자옥'을 연주한 성악가와 해금연주자, 구상의 '초토의 시'를 테마로 한 창작곡으로 대지바를 채운 작곡가 강한뫼 팀, 전쟁기 음악이 흘렀던 다방을 재현한 연주자들, 경북문학협회의 낡고 좁은 계단을 올라 만난 박시연 재즈팀의 이육사 '광야' 테마 연주와 멋진 영상들, 서민기 프로젝트의 소리 공연, 무영당 전층을 누비며 멋진 춤을 보여준 아나키스트와 타악연주를 들려준 훌라, 김진균의 '노래의 날개' 친필 악보를 받아 들고 손이 떨렸다는 성악가들….
그들은 "대부분의 청년 예술가들이 서울만 바라보고 사는데, 이번 행사를 준비, 진행하는 과정에서 우리 지역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우리 지역을 살아가는 시민들이, 청년들이 꿈꾸는 '환상도시'는 각각의 고유한 리듬을 존중하는 도시, 그리고 찬란한 예술의 기억을 간직할 수 있는 도시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이는 문화예술 아카이브가 제대로 구축되고, 활용되어야할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임언미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팀장, 대구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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