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은 시인
누군가에겐 그저 평범한 일상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필생의 소원이 되기도 한다. 얼마 전 돌아가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주머니 이야기다. 평생을 품위와 이에 걸맞은 차림으로 군중을 대해 왔던 그녀가 아이보리 계통의 캐주얼 차림에, 자연스러운 포즈로 밖으로 나섰다. 더욱 파격적인 것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점이다. 재위 67년째인 3년 전의 일이다.
태가 안 난다고 주머니를 달지 않는 사람도 있다지만, 주머니 없는 옷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수시로 메모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 필기구와 종이는 어디에 꽂으며, 때로 어색한 분위기를 만났을 때 손은 어디로 감추어야 할까? 오죽했으면 이세룡 같은 시인은 "죄수들의 슬픔은/ 주머니 없는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거나 "파자마에는 주머니가 없다/ 잠이란 일종의 짧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같은 말을 하고, 심지어 "주머니 없는 옷을 만드는/ 젊은 디자이너들을 때려주고 싶다"는 조크를 던졌겠는가? 추운 겨울에 손을 넣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주머니가 얼마나 따뜻하고 위안을 주는지. 그 속에 구슬과 딱지, 딸랑이는 동전들, 과자나 알사탕도 들어있었던 시절을 기억한다.
무엇보다 주머니는 크고 아름다운 몽상과 치유의 숨결로 이루어진 공간이다. 남의 눈에 보이고 싶지 않거나 들키기 싫은 사물이 그 속에 들어가 은신하며 숨을 돌린다. 거기에는 고즈넉한 닫힘이 끝나면 언제든 열림을 예비하는 넉넉함이 있다. 그렇다고 굳이 지퍼로 닫고 열 필요는 없다.
옷장에서 계절에 맞는 옷을 꺼내다가 속주머니에 들어있는 삼십만 원을 발견했다. 분명 넣었는데도 잊고 있다가 내 손안에 다시 돌아온 충만함! 주머니가 없었다면 누리지 못했을 행운이다. 비밀이 들어갈 때 주머니는 신비롭다. 거기에는 셀 수도 없는 많은 꿈들이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비밀이 들어간 주머니의 신비는 만지작이며 걸으며 온몸과 그 비밀을 나눌 수 있어서 좋다.
주머니의 기능과 몽상이 최대치로 발휘되는 순간은 가장 격렬한 슬픔에 잠겨 어쩔 줄 모르는 손을 담아주는 데 있을 것이다. 놀라워라. 그 때 주머니는 슬픔에 휩쓸린 자아를 만져주고 다독인다는 것. 때로 그 작은 주머니에 다른 손이 따라 들어와 치유에 동참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일어선 존재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다시 여왕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여왕인들 왜 혼자 즐기고 싶고, 감추고 싶은 삶의 목록이 없었겠는가? 왕실의 법도와 개인의 소망 사이에서 67년이나 고민하다가 주머니를 택한 그녀의 품위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 완성되었다. 그 변화에 화가 난 여왕 모후(母后)와 고문들이 한바탕 야단법석을 떨었다 해도 여왕의 행동은 통쾌하기까지 했다.
풀지 못할 근심과 상처가 있는가? 한 움큼쯤 잘 싸서 주머니에 넣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주머니, 그 따뜻한 숨결에 쌓여 상처도 어느새 빛 쪽으로 열리고, 보석으로 빛을 발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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