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일본은 동아시아 지역과 남태평양 자원 지대를 독점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냈다. 한국과 중국은 물론 인도차이나와 말라야-뉴기니-솔로몬제도를 연하는 섬들을 하나씩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미국이 걸림돌이란 것을 안 일본은 태평양함대의 기지, 진주만(하와이)을 기습 공격한다. 사실상 태평양함대를 무력화시킨다면 극동 지역은 공백 상태나 다름없다.
진주만을 선제한 일본은 남태평양 지역을 더욱 안정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일본과 하와이의 중간을 잇는 미드웨이섬을 공략한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당일(1942년 6월 4일), 태평양의 짙은 새벽 안개와 군사 정보의 유출로 일본 해군이 무참하게 침몰한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일본이 아니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실패했지만 솔로몬제도에 대한 일본의 전선은 집요했다. 전략적 조건을 갖춘 솔로몬제도의 과달카날섬을 남방의 거점으로 삼으려는 야심 찬 계획을 실행했다.
일본은 최강 세력인 미국의 남태평양 지역 진출을 억제해야 했고, 미국은 자원의 보고인 남방 지역이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 중심이 과달카날섬이었다. 과달카날의 가치를 인지하고 있는 일본과 미국은 서로 다른 접근 방법을 시도한다. 일본은 보르네오-뉴기니-솔로몬 등의 주변 섬을 차례차례 점령하겠다고 하는 소위 와조전술(蛙跳戰術·Frog jump)을 취한다. 와조는 개구리가 장애물을 뛰어넘는 것을 뜻한다.
마치 개구리가 땅을 건너뛰듯이 섬을 하나씩 점령하는 전술이다. 반면에 그것을 뒤쫓아 잡으려 한 미국은 팔을 쭉 뻗어 감아 안듯 아크라인(Arc line)을 만들고 죄어들어가는 대우회 작전을 폈다. 전자가 미시적이고 전술적이라면 후자는 거시적이고 전략적인 접근이다. 또한 전자는 단시간 안에 하나씩 잽싸게 제압해 나가는 방식이고 후자는 느긋한 시간과 넉넉한 전력으로 전장을 서서히 좁혀 들어가 목을 죄는 방식이다.
앞서 과달카날섬으로 들어간 일본군은 곧바로 비행장부터 건설하기 시작했다. 제공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다. 그러나 미국의 반격은 날카로웠다. 1942년 8월 7일, 미 제1해병사단은 과달카날섬에 기습적으로 상륙해 그 비행장의 이름을 마치 성조기를 꽂듯이 헨더슨으로 바꾼다. 그러자 일본군은 그다음 날 야간을 틈타 섬 북쪽의 작은 사보섬에 정박 중인 미국 중순양호 4척을 폭격, 침몰시켜 버린다.
이런 결과로 미 해병1사단은 과달카날섬에 고립된 채로 계속해서 비행장을 건설하면서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해야 했다. 그후 열흘이 지난 8월 18일 밤, 일본군 1천여 명이 과달카날섬 서쪽 지역으로 상륙한다. 미군의 열세함을 확인한 일본군이 후속 부대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공격을 시도한다. 오판이었다.
일본군은 오히려 미군에게 포위된 채 거의 전멸할 위기에 처하고 만다. 그러나 9월 12일 밤, 일본군이 다시 헨더슨공항을 폭격하면서 소위 과달카날 2차 전투가 본격적으로 벌어진다. 그러나 일본군은 정박 중이던 함대가 피격되자 전면 공격을 시도했으나 결국 증강된 미군에게 밀리고 만다.
1943년 1월 초까지 6개월 동안 밀고 당기는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군은 전함 엔터프라이즈가 대파되는 등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끝내 일본 함대를 격퇴하는 데 성공한다.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은 지형에 맞는 그럴듯한 와조전술을 앞세웠으나 자원과 기동력이 절대 우세했던 미국의 대우회전에 패배하고 만다. 막강한 군사력만으로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국력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일본군은 1만5천여 명이 전사하고 9천여 명이 병사했으며 1천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미군 역시 큰 인명 손실을 감내해야 했다. 포화가 휩쓸고 간 전장은 피아 간 처절함만을 남겼다. 과달카날 해전은 일본 해군이 겪은 최초의 패전이자 남태평양 지역의 제해·제공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만든 전투였다. 반면에 미국은 태평양 진출선(Arc line)을 지키는 동시에 총반격의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그런데 불행히도 일본은 여기서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호주 북방의 열도, 뉴기니-파푸아-라바울-솔로몬 군도를 연하는 섬들을 포기하지 않았고 필리핀과 미얀마 그리고 일본과 대만 사이에 있는 류구열도의 유황도와 오키나와섬을 모두 불바다로 만들었다.
1944년 10월, 남태평양 하늘에는 일본의 가미카제 특공대가 꼬리에 불을 붙이고 필리핀 레이테 해상의 미 제7함대를 공격하는가 하면 그에 이어 오키나와의 미군 항공모함으로 겁 없이 날아들었다.
'23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고 끝까지 자신한 일본군의 무모함은 결국 연합국의 핵 사용을 자초하고 말았다. 태평양전쟁은 역사 앞에서 어떻게 지구촌의 명줄을 끊어 버리는 핵무기를 불러들였느냐를 실증해 주고 있다. 그것은 인류사에 영원히 씻지 못할 비용과 빚으로 남게 되었다. 지금도 세계의 특정 지역에서는 그 어둡고 공포스러운 검은 그림자가 평화의 햇살 앞을 어른거린다.
김정식 육군삼사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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