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 지음·이세진 옮김/ 열린책들 펴냄
이탈리아의 지성 움베르토 에코(1932~2016)의 강연록을 모은 '에코의 위대한 강연'이 최근 출간됐다.
철학자이자 기호학자이며, 언어학자인 에코는 우리 시대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사상가 중 한 명이다. 철학과 미학, 대중문화 등 인문학 전반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소설가로서의 역량도 뛰어났는데, 그의 첫 소설 '장미의 이름'은 현대 문학의 고전으로 꼽힌다.
이 책은 에코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매년 열리는 문화 축제 '라 밀라네지아'에 참여해 강의한 내용들을 한 데 묶은 것이다. 에코는 타계하기 직전인 2015년까지 거의 매회 이 행사에 초청을 받았다. 그 때문인지 책이 다루는 주제도 광범위하다. 미와 추의 본질, 절대와 상대, 비밀과 음모의 힘, 예술의 불완전성 등 12편의 글이 실렸다.
책의 첫 장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단테 알리기에리나 토마스 아퀴나스, 귀스타브 도레, 샤르트르 등 낯선 이름들을 자주 마주쳐야 하기 때문. 인문학과 고전(古典)에 관심이 있다면 비교적 수월하게 읽을 수 있지만,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이해하는 데 큰 지장은 없다.
에코는 방대한 지식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각각의 주제의 의미가 시대별로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읽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서문 격에 해당하는 '거인의 어깨 위에서'는 책의 주제를 관통하는 글이다. 여기서 에코는 '거인과 난쟁이'에 대해 얘기한다. 여기서 거인은 인류가 지금까지 축적해온 지식을, 난쟁이는 그 지식에 발을 딛고 현재를 살아가는 자들을 일컫는다.
"베르나르두스는 우리가 거인의 어깨에 올라선 난쟁이 같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거인보다 멀리 볼 수 있으나 이는 우리가 키가 크거나 시력이 좋아서가 아니요, 그들의 어깨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일궈낸 모든 성취는 과거 선조로부터 일정 부분 빚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난쟁이가 언제나 거인에 우호적인 것은 아니다. 에코는 거인과 난쟁이의 이야기가 오래된 '부친 살해' 은유와 관련이 깊다는 점에 주목한다. 아버지를 죽인 오이디푸스 같은 이야기는 학문과 문화의 영역에도 통용된다는 것이다. 그는 기존의 것을 지키려는 자들과 혁신을 추구하는 자들 사이의 오랜 대결을 사례로 들며, 이 과정에서 혁신이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아무리 새로워 보이더라도 혁신의 기준은 결국 과거에 맞춰져 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성당이 기존 틀을 유지하며 중축과 보수를 거듭하는 것처럼, 예술을 포함한 수많은 새로운 지식 체계가 전통에 기대어 이룩된다는 것이다.
"마르셀 뒤샹은 모나리자에 수염을 그렸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필요했다. 르네 마그리트는 자기가 그린 것이 파이프임을 부정하기 위해 아주 꼼꼼하게 사실적으로 파이프를 그려야만 했다."
이 밖에도 에코는 다양한 화두를 던지는데, 예술의 불완전성에 대해 말하는 대목은 특히 흥미롭다. 그는 예술 작품에 있어 불완전성은 "어떤 부분이 빠져 있거나, 어떤 부분이 더 붙어 있거나" 두 가지 경우라고 분석한다. 그리고 이런 불완전성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다. 이어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밀로의 '팔 없는 비너스'나 엉성한 컬트 영화가 인기를 얻는 이유가 "끊임없이 잃어버린 전체를 상상하도록 우리를 매혹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496쪽, 2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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